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5)-용아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5)-용아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08.21 11: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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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시인 박용철의 호를 따서 명명
광주 대표 산단인 하남산단의 주도로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 주

용아로

용아로는 애국시인 박용철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호인 용아를 따서 2008년 8월 25일 고시되었다. 이 길은 소촌동 122-12번지에서 시작해 안청동 729-2번지에서 끝나는 길이 7251m의 도로다.

   

▲ 광주지방경찰청이 보이는 용아로의 시작점 

소촌동에서 시작되는 용아로에 도착했다. 금봉로로의 급커브 주의가 붙어 있다. 시작점에서 보니 좌로는 KTX호남선이 지나고 있고, 우로는 광주지방경찰청이 자리잡고 있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광주지방경찰청의 주소는 범죄신고 전화번호와 같은 용아로 112번지다.

경찰청을 지나 용아로를 걸어봤다. 바로 옆 사암로에 비하면 이 곳은 아직 개발 중인 택지였다. 새로 만들고 있는 아파트들과 곧 무언가 지을 것 같이 다져놓은 땅들이 많이 보였다.

▲ 아직 개발중인 용아로

광주하남일반산업단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이미 많이 개발된 아파트단지와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설 학교들이 보였다. 아직 개발 중인 탓에 용아로는 삭막하다는 느낌이다. 시에서 색다르게 개발을 연구해본다면, 광주의 관광명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주차공간 부족...많은 화물차들로 운전 조심해야

▲ 갓 길을 점령한 불법 주정차 차량들

하남산단과 가까워질수록 도로에는 25t 덤프트럭들이 큰 짐을 등에 메고 꼬리를 물며 이동했다. 그 뒤를 따라 산단의 한 가운데 통로인 용아로에 들어섰다.

▲ 하남산업단지 기념탑

하남산단은 1번로에서 10번로까지 10개의 사거리가 있다. 여기서 조심해야할 것은 역시나 큰 화물차이다. 사거리와 공장출입구에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니 작은 차들은 지날 때 경적으로 자신이 존재를 알려야하는 수고로움이 잦은 곳이다.

하남산단에 들어서자마자 길가 양 옆으로 자가용들이 1번로에서 10번로까지 쭉 나열되어 있었다. 산단에 다니는 사람들이 주차 공간이 부족하여 길가에 불법 주차한 것으로 보인다.

산단이 끝나는 10번로 사거리를 지나는데 옆에 공장단지와는 어색하게 푸른 나무와 풀들이 무성한 안청공원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기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형상시키는 모습이 조각된 기념탑이 공원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밑에 키보드 모양으로 조각한 돌 조각과 탑의 꼭대기에 전선으로 꾸민 것이 공업단지에 걸맞은 작품이다.

약 7km의 용아로는 산단 9번로를 지나 하남산단의 끝 2차선의 임곡로와 만나며 끝이 났다.

광주가 낳은 서정시인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1904~1938)

▲ 앞줄 왼쪽부터 김윤식 정인보, 변영로, 윗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로도 활동한 박용철은 호남 학맥의 중심을 이뤘던 충주박씨의 후손으로 호는 용아(龍兒)라고 불린다.

그는 현존하는 용아생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덧셈과 뺄셈을 하고 사자소학을 외우는 등 천재로 불렸다고 알려진다. 서울에 배재고에 진학한 그는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청산학원 독문과 4학년에 편입한다. 그곳에서 평생지기인 영랑 김윤식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편입하였으나, 반년 만에 자퇴한 후 고향에서 문학, 철학 등의 책들을 읽으며 세월을 보낸다.

그는 이후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1930년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게 되고, 그의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한다.

1931년 문학 동인활동을 하며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 1933년 순수문예지인 ‘문학’ 등을 계속 발간하며 많은 외국의 시와 희곡을 번역해 소개하며 외국문학가로서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이후에는 비평가로도 활동하며 ‘효과주의 비편농강’, ‘조선문학의 과소평가’ 등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자비를 들여 ‘정지용 시집’과 ‘김영랑 시집’을 내주기도 했다.

용아는 시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20년대 위축된 문학의 자율성 정립에 앞장서고, 영랑은 남도의 가락에 서정시의 숨결을 담아 노래하며 한국현대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다.

하지만 같이 활동한 김윤식, 정지용 등 보다 그가 덜 알려진 이유는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박용철 전집>은 미망인 임정희 여사와 박용철의 문우인 김영랑, 함대훈, 이하윤, 김광섭, 이헌구 등이 생전의 유고들을 정리하여 시집과 평론집, 두권으로 편집하여 간행됐다.

용아의 자취는 광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시비가 송정공원과 광주공원에 세워져 있고, 용아가 살았던 생가가 현존하고 있으니 그 곳에 가면 동판으로 만든 그의 초상과 그를 설명하는 알림들을 볼 수 있다.

현재 광산구에는 1992년부터 용아 박용철을 기리며 추모하는 전국백일장대회도 열리고 있다.

도심 속 초가집, 용아생가

▲ 용아생가

용아로 가까이에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용아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여 용아생가(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 )를 찾아갔다.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용아생가에 도착하였다. 바로 앞 호에 소개했던 사암 박순의 송호영정 바로 밑에 지어진 넓은 초가집이었다. 도시개발 속에 존재하는 이 초가집은 앞으로도 계속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떠나가는 배

용아생가는 1986년 2월 7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박용철은 고향 사람들에게 개화문명과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웠다고 한다.

이 곳엔 그의 후손들이 계속 살아가며 용아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토론회, 창작문학교실, 문화공연 등을 이어가고 있었다. 

열려있는 집 안에 들어서니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구경하러 왔냐”며 “잘 보고 가라”고 개방된 대문과 같은 인자함을 베풀어 주었다.

화단 쪽엔 그의 대표시인 ‘떠나가는 배’가 매끈하고 큰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시는 고향과 정든 사람들을 떠나는 슬픔(일제하에서 조국을 떠나는 울분과 비애)를 표현하고 있다. 가수 김수철이 노래로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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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희 2020-06-08 15:43:52
업적이 뭐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