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0)-설죽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0)-설죽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07.20 0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말 의병장 양상기의 호를 따서 명명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 설죽로가 시작하는 신안교 앞 도로

설죽로는 한말 의병장인 양상기를 기리기 위해 신안 제1교에서 북구 일곡동까지 그의 호인 설죽(雪竹)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길은 무려 6626m에 달하는 긴 길이다. 임동 100-3에서 시작하여 일곡동 816-1까지 신안동, 오치동, 용봉동, 매곡동, 일곡동 등을 지난다.

설죽로는 서암대로에 위치한 신안교에서 시작이 된다. 신안교 앞도로는 매우 복잡하고 사고가 잘 나는 구간이어서 그런지 경찰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어 운전자와 통행자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안교에서 북부경찰서 가는 방향으로 올라가는 설죽로는 끝나는 지점까지 6차로의 큰 길이다. 호남고속도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용봉패션의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패션의 거리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메이커 의류가게들이 줄을 지어 들어서 있다.

설죽로의 골목인 202번과 196번길은 가까이 전남대학교가 위치해 있어 그런지 입구부터 원룸과 고시원 등이 눈에 많이 띄었다.

▲ 남도향토음식박물관

호남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북부경찰서 사거리를 지나니 정말 많은 학교가 이 길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광주공고, 고려중·고, 국제고, 전남여상, 삼각초, 일곡초·중, 서일초 등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어 북구 교육의 중심이라 불릴만 했다.

북구 교육의 중심

여러 학교와 아파트단지를 지나면 일곡지구 입구사거리 앞에서 남도의 옛 전통음식을 만들고 체험할 수 있는 남도향토음식박물관(설죽로 477)이 길쭉한 사각형 모양으로 알록달록한 벽면 장식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이 박물관의 입장료는 무료다. 겸사겸사 들어가 보았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구경하러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며, 건물 내의 전시실이나 체험실의 문들은 다 닫혀 있었다.

▲ 아파트로 가득찬 일곡동
▲ 주민들의 반찬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하는 일곡노점

인구 밀집지역답게 일곡지구에 들어서니 많은 거리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거리가게들은 인도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오가는 주민들에게 반찬거리와 입을거리 등을 팔고 있었다.

▲ 설죽로가 우치로와 만나며 끝이 나는 일곡교차로

여느 도로와 마찬가지로 설죽로 역시 많은 아파트와 상가, 주택들이 도로 주변에 가득했다. 특히 많은 학교를 품고있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6.6km를 숨가쁘게 달려온 설죽로는 일곡교차로에서 우치로와 만나며 끝이 났다.

설죽(雪竹) 양상기, 의병장 양진여의 아들

전라남도 광산(현 광주광역시)출신으로 의병장 양진여의 아들이다. 설죽(雪竹) 양상기는 1883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운 풍암정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대한제국의 군인 한국 진위대 병사 출신이었는데, 1907년 8월에 강제 해산 돼 버리자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1908년 4월 23일, 아버지가 의병장인 것이 알려져 순사직에서 면직되자 곧장 의병장인 아버지 양진여의 뜻을 따라 본격적인 대일 항쟁 의병의 길로 들어섰다.

1908년 5월 군 경험과 경찰관 경험을 거친 그는 80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양상기의 의병부대는 예전 군인들과 평민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이 부대는 도통장에 안판구(安判九), 후군장에 이문거(李文擧), 포군장에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에 조사윤(曺士允), 참모장에 유병기(劉秉基) 등으로 편제됐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주로 나주·동복·화순 등지에서 투쟁을 펼쳤고 부친의 의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맹활약했으며, ‘한국(韓國)의 복구(復舊)’를 주창하며,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및 방화 등과 같은 활동을 펼쳤다.

부자 의병장 양진여와 양상기

▲ 부자 양진여(왼쪽) 양상기 의병장 , 출처: 부자의병장기념사업회 카페

양상기의 아버지인 서암(瑞菴) 양진여는 1907년 9월 수학하던 중 격문을 살포하고 광주, 담양, 장성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하며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1908년 11월 중순에는 전남지역의 의병들이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유인하고 섬멸하기 위해 담양군 대전면 한재로 몰려들었다. 양진여 의진 300여명, 전해산 의진 300여명, 화순·동복에서 온 양상기 의진 200여명을 연합하여 900여 명의 규모로 대오를 이뤘다.

긴 시간의 격전으로 적을 많이 베었지만 연합의 피해도 막심했고 양진여는 총상까지 입게 됐다. 겨울로 들어서면서 의병들은 추위에 사기가 떨어져 투쟁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양진여는 자신의 상처를 돌볼 겨를 없이 소규모 의진을 이끌고 다음해 6월까지 광주·나주·영광·장성 등지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공격했는데 양진여는 이 기나긴 싸움에서 또 다시 크고 작은 총상을 입게 되어 담양 갑향골로 향해 상처 치료에 전념했다.

1909년 8월 25일 광주분견대의 가지무라 중위의 정찰대 40여 명이 의병장 검거에 나서 양진여를 체포하여 수감됐고, 이어 12월에 그의 아들 양상기 의병장마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1910년 8월 1일, 양진여 의병장은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린 강도 방화 및 살인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직했고, 그 후 8월 1일, 아들 양상기마저 27살이란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똑같은 장소(대구감옥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백마산에는 의병장 양진여 양상기 두 부자의 묘지가 양지 바른편 기슭에 아래 위로 모셔져 있다. 대구형무소에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의병장 양상기의 무덤은 외로이 가묘로 남아 있다.

정부에서는 이 두 부자의 공훈을 기리며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설죽로가 왜 설죽로인지 아나요?

설죽로에는 설죽로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하나도 없었다. 또 그의 값진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호를 따서 도로명으로 명명하였지만, 그 도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도로명이 설죽인지 물어보았으나 아는 이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형제가 의병에 참전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부자가 참전하는 경우는 손으로 꼽는다. 부자가 의병장으로 활동하고 투쟁했었다는 기록과 알림이 명명된 길에 구비된다면 우리 광주의 볼거리가 좀 더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이 두 부자의 호인 서암과 설죽은 현재 서암대로와 설죽로라는 도로명으로 쓰이고 있다. 이 두 도로는 예사롭게도 신안교에서 만난다. 이들 부자의 의로운 뜻은 이 길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