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3)-하서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3)-하서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08.0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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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있는 관광명소, 문화의공간 하서로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하서로는 호남의 유학자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 명명한 길이다. 이 길은 운암동 광주문화예술회관 사거리에서 시작하여 무려 전남 담양군 경계인 북구 태령동까지 11.4km의 아주 기나긴 길이었다.

   
 

하서로 유래를 알 수 있는 기념석비 세워져 있어

하서로는 운암사거리(북문대로)에서 문화예술회관 방향으로 파생된 길이다. 그가 주로 활동한 곳이 이 지역은 아니었지만, 하서로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문화예술회관 사거리의 신호등 부지 앞에는 하서로가 하서 김인후 선생의 호를 사용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념석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 표지석을 보았을 것이고, 왜 하서로인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중외공원 주변의 많은 문화시설들 속, 하서 김인후 동상 

중외공원 주변에는 어린이대공원, 광주시립미술관, 국립광주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어 시민들이 문화시설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서 김인후선생의 동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 운행되고 있지 않는 중외공원 내의 어린이대공원

문화예술회관을 지나 바람개비들이 맞이해주는 중외공원(하서로 50)으로 들어갔다. 몇개의 놀이기구들이 설치 되어 있었지만 이날 어린이 대공원은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운행되고 있지 않아 아쉬웠다. 평소 주말에는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놀러온 청소년들이 즐겨 이용하는 곳이다. 하지만 시설이 노후하고 관리가 잘되어 있지 않아 주의를 요하는 곳이기도 하다.

▲ 중외공원 문화산책로

놀이공원에서 나와 중외공원 문화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문화산책로를 걷다 보니 더위에 지쳐 있는 심신을 중외공원 주변 일대에 펼쳐진 문화시설을 이용하면서 즐기는 것도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외공원 주변 일대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문화 밀집구역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 광주시립미술관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고 소개하는 광주시립미술관(하서로 52)은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미술의 활성화, 교육 등을 위하여 1992년 지방 공립미술관으로 처음 개관된 미술관이다. 광주시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본관과 비엔날레관, 교육홍보관 등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은 2,800m², 비엔날레관 800m², 교육홍보관 1,300m² 등의 넓은 전시실을 가지고 있다.

▲ 광주시립미술관 앞에 위치한 하서 김인후 동상

광주시립미술관 앞엔 안중근의사 동상과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 그리고 하서로의 주인 하서김인후의 동상이 그의 대표 시들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自然歌(자연가) - 김인후(金麟厚)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난 몸이라 늙기도 절로절로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已矣哉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 국립광주박물관

중외공원을 나와 하서로를 따라 좀 더 위로 올라갔다. 그 곳엔 국립광주박물관(하서로 110)이 푸른 나무들 사이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관에 이끌려 박물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입장권을 사러 매표소에 갔더니 무료라고 한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면 잘 꾸며진 정원이 뜨거운 햇빛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럽게 반겨준다.

눈 앞에 보이는 기와 형태로 지어진 커다란 본관은 위압감보다는 시원스레 하늘을 날 듯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 하다. 내부로 들어서니 아이들과 함께 한 가족들과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 선생님들이 전시실 한켠을 메우고 있었다.

1층과 2층엔 선사시대부터 불교미술, 도자기, 유교문화, 서화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야외에는 고인돌과 가마, 석탑 등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총면적 80,444m²(24,334평)의 크고 넓은 국립광주박물관은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많은 볼거리와 유익함을 주면서,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광주의 관광명소로 소개할 수 있는 문화시설이기도 하다.

박물관 맞은편의 한국도로공사 광주지사(하서로 111)를 지나 본촌산단에 도착했다. 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식음료, 조립금속, 섬유의복, 비금속, 목재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들이 입주한 본촌산업단지가 양산동의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담양으로 이어지는 길 하서로

본촌산단을 지나 우치공원 가는 방향으로 하서로를 따라 이동했다. 편도1차선으로 점점 좁아지는 길에 주변 환경은 논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편도1차선의 하서로 672번길은 용전교차로의 우치로와 만나며 끝이 났다.

그리고 용전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올라가니 용산교차로에서 하서로는 다시 시작됐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서로는 편도2차선의 길로 양옆엔 뜨거운 햇볕을 받아 무럭무럭 익어가는 이삭들로 가득했고, 마음놓고 달리며 드라이브하기 좋은 도로였다.

용전마을, 종방마을, 용강마을, 두촌마을 등 도심에서 볼 수 없는 마을들을 지나 고창담양고속 태령교를 가로질러 달리니 하서로의 끝이 보인다. 11.4km의 기나긴 길 하서로는 담양군에 들어서기 전 송강정로를 만나며 종료됐다.

하서 김인후(1510년 ~ 1560)

하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6세기 호남 도학을 대표하는 도학자로 전남 장성 출생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이고 본관은 울산이다.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태어난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총맹하고 시재가 뛰어나 시를 잘 지었다. 1519년엔 당시 전라도 관찰사인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우며 지도를 받았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퇴계 이황 등과 성균관에서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으며 교류했다.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중종이 승하한 후 1545년. 제12대 인종이 직위 하지만, 8개 월만에 사망하였다. 김인후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하서는 순창 점암촌에 초당을 세워 주자학과 후학 연구에 몰두하며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했다. 또한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그는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면서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設) 형성에 도움이 된다.

또한 그는 성경을 수양론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의 정학뿐만 아니라 지리, 천문, 산수, 의약, 율력 등 어느 하나 뒤처지는 것이 없었다. 그의 제자로는 기효간(奇孝諫)·정철(鄭澈)·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변성온(卞成溫)등이 있다.

시문에도 능하여 면앙정 송순과 교유하였고, ‘하서집’ 등 10여 권의 시문집을 내었으며, 향후 1560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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