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1)-송강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1)-송강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7.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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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의 호를 따서 명명

송강로는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다. 금곡동 산 163-3번지에서 시작해 충효동 393-1번지에서 끝나는 2차로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충장사에서 환벽당까지의 길이다. 2009년 11월 19일 고시되었고, 총 연장은 4494m이다.

송강로는 충장사에서 환벽당까지 총 연장은 4494m의 숲길이다.

이 길의 주인공인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이며 이름은 철이고 본관은 영일이다. 1536년 돈령부판관인 아버지 정유침(鄭惟沈)과 죽산안씨인 어머니 사이에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큰누이가 인종의 후궁이며, 막냇누이가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분에 궁중에 비교적 자유로이 출입하며 경원대군(후일의 명종)과 친하게 지냈다고 전해진다.

10세이던 1545년에 을사사화로 매형 계림군이 역모로 처형당하고, 맏형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버지가 유배길에 오르면서 삶의 근간이 흔들리며 인생의 풍파를 겪기 시작했다.

16세가 되던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7년 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등으로부터 수학했으며 제봉 고경명, 서하 김성원, 백호 임제, 청련 이후백 등과 교유했다.

서인의 영수로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당대의 석학들에게서 수학하며 학문을 갈고 닦은 끝에 26세 때 진사시 급제, 27세 때 문과 별과 장원을 하고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로 출사하였다.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 전한,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역임하고,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중심에 서있었다.

선생은 40세 때 당쟁으로, 43세 때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였고, 49세 때 대사헌으로 재직하다가 또 다시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여 송강정에서 은거하였다. 56세 때 세자책봉과 관련하여 명천으로 유배되었고 58세 때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도 송정촌에서 칩거하다 선조 26년인 1593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철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정치적 부침(浮沈)을 거듭하면서도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훈민가(訓民歌)>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주옥같은 가사와 한시, 단가들을 남겼다. 저서로는 문집인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조 100여 수가 현재 전하고 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

선생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강로가 명명된 이유는 선생이 이룬 바로 이 문학사적 기여가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명 배경을 가지고 있는 송강로를 취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연일 폭염경보가 발령되고 있어서 낮에는 취재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송강로는 취재가 아니더라도 자주 가는 길이다. 나뿐 아니라 광주 시민 모두에게 친숙한 길일 터이다. 산장으로 가는 무등로에 이어 충장사에서부터 광주호 호수생태공원까지 내달리는 송강로는 광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엔 볼거리, 먹을거리들도 풍부해 가족들, 연인들이 즐겨 찾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나라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아름다운 숲길이다. 그래서 광주 시민들은 이 숲길을 트레킹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맘껏 즐기곤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숲길

아침이라 그런지 산 공기가 상쾌하다. 신양파크호텔을 조금 지나 지호로의 끝자락에서 산장가는 방향으로 우회전을 했다. 지호로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적 인상주의 화가로, 그리고 광주를 대표하는 현대 서양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

벌써부터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숲터널이 나온다. 도로 양쪽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서로 손을 맞잡으며 만들어낸 터널 사이로 간간히 비추는 햇살이 곱다. 이 숲터널은 광주 시민들의 상수원 중의 하나인 광주 4수원지 다리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충장사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광주 4수원지는 1960년대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1970~80년대에는 광주 시내 초․중․고등학교 소풍장소로 꽤 유명했다. 1989년 이철규 열사가 의문사한 곳이기도 하다.

이철규 열사는 89년 1월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을 맡아 교지에 게재한 논문으로 전남지역 공안합수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현상 수배를 받았다. 그해 5월3일 광주 4수원지 청암교에서 광주북부경찰서 소속 형사들의 검문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됐고, 5월10일 4수원지에서 참혹한 변사체로 발견됐다. 열사의 죽음을 두고 지금까지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국가기관은 경찰을 피해 수원지 철조망을 넘어 도망치려다 미끄러져 익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조사 불능’ 결정을 내렸으며 2004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4수원지, 이철규 열사가 의문사한 곳

또 이곳에는 청품쉼터가 있다. 이곳은 더운 여름날 저녁 무더위를 식히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여기에서 송강로로 가려면 청품쉼터를 바라보고 산장으로 가는 우측 길로 더 올라가야 한다. 좀 더 가니 충민사가 눈에 들어온다. 충민사는 1627년(인조 5) 정월, 동방의 새로운 강자 후금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왔을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순국한 전상의(全尙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민사를 뒤로하고 다시 충장사를 향해 무등로를 달렸다. 송강로는 바로 충장사 조금 못미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충장사(송강로 13)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충장사를 지나니 금정촌으로 들어가는 송강로 35번길이 나온다. 금정촌(金井村)은 무등산장 복원사업으로 이주하여 생긴 마을이다. 금곡동의 샘처럼 물 맑은 곳이라 금정이라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금곡마을은 광주 특산물 1호인 무등산수박의 산지로도 유명해 수박마을로도 불린다. 이 때문에 이 길 왼편에는 무등산수박공동직판장 시설이 있다.

무등산수박의 산지로도 유명

또한 이곳 금곡마을은 광주 특산물 1호인 무등산수박의 산지로도 유명해 수박마을로도 불린다. 이 때문에 이 길 왼편에는 무등산수박공동직판장 시설이 있고, 금곡마을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들도 꽤 많다. 다양한 메뉴들을 구비하고 있는 이러한 식당들은 광주호 호수생태공원 앞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금정촌 입구에서부터 충효동까지 송강로 양 옆에는 백일홍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어 취재를 즐겁게 했다.

충효동 약간 못미처 오른편으로 무등산분청사기전시실과 풍암정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무등산분청사기전시실은 조선 초기인 15~16세기에 광주 무등산 주변에서 생산됐던 분청사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1998년에 건립된 전시관은 350㎡에 자기와 도구, 주변 수습자료, 복제품 등 200여 점의 실물자료와 함께 가마시설을 재현한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어 분청사기의 제작과정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 특히 분청사기전시실 옆에 위치한 사적 141호 충효동 요지는 총 길이 20.6m에 서벽쪽에 위치한 5개의 출입문과 산의 자연경사면을 이용한 굴뚝이 드러나는 등 우리나라 도요지 발굴사상 처음으로 완벽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풍암정은 조선 중기 의병장 충장(忠壯) 김덕령(金德齡)의 동생인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누정이 지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등의 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자 자체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졌고, 김덕보는 임진왜란 이후에 은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정 앞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고, 특히 가을이면 누정 이름에 걸맞게 단풍나무가 그 주변을 붉게 물들여 그 풍광 또한 멋스러워 운치를 더한다.

왕버들 군과 광주호 호수생태공원도 이 길에

지금은 수령 400년 이상을 자랑하는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다..

충효동에 이르니 왕버들 군이 먼저 반긴다. 충효동의 역사는 분명치는 않으나 예부터 성(城)이 있어 성안 또는 석저촌(石低村)이라 불렀다. 원래 왕버들 군은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는 경관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매화와 왕버들 1그루는 말라 죽었고, 또 한 그루의 왕버들과 소나무는 마을 앞 도로를 확장하면서 잘라버려 지금은 수령 400년 이상을 자랑하는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다. 또 이곳에는 김덕령 장군의 생가터도 있다.

왕버들 군 앞에는 생태탐방로가 조성된 광주호 호수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어 가족들의 탐방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충장사에서 무등산 자락을 타고 무등산수박마을, 무등산분청사기전시실과 충효동 요지, 풍암정, 왕버들 군, 김덕령 생가터, 광주호 호수생태공원 등 풍부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간직한 송강로는 마침내 환벽당에 이르러 끝이 난다.

환벽당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다.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었으며, 벽간당(碧澗堂)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遺書石綠)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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