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3)-양촌길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3)-양촌길
  • 유현주 수습기자
  • 승인 2016.05.3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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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정엄과 충견 이야기가 담긴 정겨운 골목길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 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사직산과 양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남사면에 자리 잡은 오래된 마을 양림동. 양림동은 일제강점기에 선교사가 들어와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면서 서양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덕분일까. 우일선 사택, 수피아여자고등학교 등 서양인 선교사들이 지은 건물부터 이장우 가옥, 최승효 고택 등 전통의 멋을 그대로 보존한 한옥까지. 오랜 전통을 지닌 양림동은 다른 동네에 비해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양림동의 중심을 세로로 지나는 길이 있다. 바로 양촌(楊村) 정엄(鄭淹)의 효행을 기리는 양촌길이다. 정엄의 호인 양촌(楊村)을 그대로 길 이름으로 사용한 양촌길은 남구 양림동 111-16번지 은성유치원을 시작으로 양림동 166-6번지까지 360여 미터에 이르는 작은 골목이다.
 
효자 정엄과 충견 이야기
 
정엄(1528-1580)1558(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해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그는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했다. 1574(선조 7)에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며 어머니를 정성껏 간병했다
 
정엄은 손수 죽을 끓이고 약을 달이며 쾌유를 하늘에 비는 등 밤낮 없이 정성껏 어머니를 간호했다. 하지만 그의 지극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뜨게 되고 어머니의 장사를 치른 뒤 정엄 또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병을 얻어 어머니를 따라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정엄의 갸륵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1611년(광해 3)에 국가에서 정려(旌閭)를 세웠다.
정엄의 갸륵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1611(광해 3)에 국가에서 정려(旌閭)를 명해 이곳 생가터 입구에 정려각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정려각은 이전의 것이 퇴락되자 1975년 그의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석조로 재건한 것이다.
 
그의 효행을 기린 정려 옆에는 돌로 된 작은 강아지 상이 하나 있다. 바로 정엄의 심부름을 하던 충견의 모습을 본뜬 충견상이다. 정엄의 개는 한양과 평양 등지에서 감사를 지내던 정엄의 아버지와 정엄 간의 연락은 물론, 한양 지역으로 전달하는 문서를 신속하게 배달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개는 정엄이 각종 문서나 연락사항을 보자기로 싸고, 가고 올 노자돈 만큼의 엽전을 전대에 넣어 목에 걸어주면 보내고자 하는 곳을 다녀왔고 지정해 준 주막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영리했다. 또한 주막에서 밥값만큼의 엽전을 빼면 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편지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보따리를 열어보려 하거든 사납게 으르렁거려 겁을 줘 내쫓을 정도로 영리한 개였다고 전해진다.
 
어느 겨울 정엄이 급한 일로 개를 한양까지 심부름을 보냈다. 당시 개는 새끼를 밴 지 2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는 지금의 전주 부근에서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게 되었고, 주인이 살고 있는 곳까지 한 마리씩 나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아홉 번째의 새끼를 나르다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 정엄의 심부름을 하던 개의 모습을 본뜬 충견상. 정엄의 개는 한양과 평양 등지에서 감사를 지내던 정엄의 아버지와 정엄 간의 연락은 물론, 한양 지역으로 전달하는 문서를 신속하게 배달하기로 유명했다.
자신이 무리하게 심부름을 시킨 탓에 개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슬퍼하던 정엄은 개의 상을 조각케 해 집 뜰에 세우고 추모했으며, 양촌공 효자비가 세워질 무렵 충견상도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인근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옛날에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심부름도 잘 하던 개가 있었는데, 하루는 주인의 심부름을 하다 개가 죽어 주인이 슬퍼하며 충견상을 세웠다고 들었다며 충견상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최근 정엄의 충견은 동개비라는 캐릭터를 통해 부활했다. 400년 전 편지를 배달하던 정엄의 개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배달부 동개비는 마을 곳곳에 그림, 조형물 등으로 등장하며 양림동의 마스코트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양림동에 위치한 이야기배달부 동개비카페에서는 인형, 에코백, 파우치 등 동개비 캐릭터 상품도 판매하고 있다. 옛 이야기 속의 충견이 현대의 마스코트로 변해 양림동이라는 마을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정엄의 충견 이야기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만든 캐릭터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
1500
년대에 살았던 효자 정엄과, 주인의 심부름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충견의 감동적인 이야기. 오랜 옛날의 설화로만 생각될 수도 있었던 이런 이야기들은 현대에서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다시태어나 후세에 전달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공존하는 길
 
양촌길은 총 길이 360여 미터의 짧은 골목길이다. 하지만 이 짧은 골목에 이장우 가옥, 최승효 고택 등의 전통 한옥과 한희원미술관 등 현대의 문화시설이 공존하고 있다.
 
▲ 1899년 세워진 이장우 가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대문간으로 구성된 전통 상류가옥이다.
1899
년 세워진 이장우 가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대문간으로 구성된 전통 상류가옥이다. 이 가옥의 주인인 동강 이장우(1919~2002)는 동강유치원, 동신중·고등학교, 동신여중·여고, 동강대학, 동신대학교를 설립해 호남 지역 교육 발전에 이바지 한 인물이다. 곳간채는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9년에 복원되었다.
 
최승효 고택은 1921년 지어진 집이다. 이 집의 건립자인 최상현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재력가였다. 그는 집의 건축자재로 백두산과 압록강 인근의 목재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목재가 썩지 않도록 바닷물에 3년이나 담가두었다고 할 정도로 집을 지을 당시 큰 공을 들였다. 또한 지붕 밑에 다락이 있어, 독립운동가 들이 피신하던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
 
▲ 건축적, 미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최승효 고택은 현재 최승효 선생의 3남인 최인준 씨가 관리하고 있다.
1965
년 집을 인수하게 된 최승효 선생은 광주 MBC창립을 주도했던 인물로, 이 집을 모든 이들이 향유할 수 있는 광주 문화 예술의 사랑방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건축적, 미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최승효 고택은 현재 최승효 선생의 3남인 최인준 씨가 관리하고 있다. 고택이 개방하고 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대문이 굳게 잠긴 모습이었다.
 
▲ 양림동 출신 화가 한희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한희원미술관
양촌길의 중심길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 가운데엔 양림동 출신 화가 한희원의 작품을 전시한 한희원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주택을 개조해 전시공간으로 꾸민 그의 미술관에서 거친 붓 터치가 살아있는 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재개발 열풍을 피해, 근대문화역사마을로 떠오르고 있는 양림동. 그 중심엔 양촌길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구불구불하고 비좁아 차 한 대도 들어가기 어려워 보이는 옛 골목엔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함께 영글어있다.
 
양촌의 흔적이 없는 양촌길
 
앞에서도 한 번 언급했듯 양촌길은 효자로 이름난 양촌 정엄의 호를 딴 길이다. 하지만 양촌의 효행을 기린 효행비나 충견상은 양촌길이 아닌 서양인 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의 이름을 딴 서서평길에 둘러싸여 있다. 양촌의 흔적이 양촌길에 없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양촌 정엄의 효행을 기린 정려는 1611(광해 3)부터 현재의 위치인 이곳 생가터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명주소를 정할 당시엔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장우 가옥, 최승효 고택 등이 위치한 길을 양촌길로, 정엄의 생가터인 정려 주변은 서서평길로 정해버린 것이다.
 
양촌 정엄의 효행을 기리며 도로명을 양촌길로 정한 만큼, 양촌 정엄과 좀 더 관련 있는, 정엄의 흔적이 남겨진 곳을 양촌길로 명명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관계 기관은 이 문제와 관련해 좀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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