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유산 콘텐츠화(9) 일기
호남기록유산 콘텐츠화(9) 일기
  •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 승인 2015.06.04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의림의 「일신재 일기」
일기(日記)는 한 개인의 생활사를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 전개되는 모든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기를 통해서 한 개인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측면까지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일기는 낱장의 고문서에 비해 책의 형태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과 맥락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초고본의 경우에는 일상사를 가감이 없이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서 한 개인의 실생활을 직접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자료 가치 측면에서 일기가 그 어떤 자료보자 높다는 말이다.

호남지역에는 많은 일기가 산재되어 있다. 호남 지역의 넓은 농토와 풍요로운 물산, 호남 사람들의 수준 높은 생활 문화를 감안하면 충분히 예견되는 사실이다. 일기는 문집 속에 들어있기도 하고, 별도로 존재하기도 한다.

종류별로는 일상생활의 일기, 유배생활의 일기, 관직생활의 일기,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기행일기, 국난이 있을 때 의병활동을 기록한 의병일기, 서원을 건립하고서 그 과정을 기록한 건축일기, 문집을 간행하고서 그 과정을 기록한 출판일기 등이 있다.

이런 일기는 지역사를 살피는 데에 있어서 매우 긴요한 원형 자료이며, 그것을 통해서 호남의 지역사를 훨씬 더 풍부하게 엮어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일기에 대한 실태 파악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현황마저 조사⋅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소중한 자료가 유실의 위험도 크고, 그 가치 또한 알려지지 않은 채 사장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에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호남기록문화유산 발굴·집대성·콘텐츠화 연구사업을 (재)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과 함께 수행하고 있다. 2012년부터 호남 지역 일기자료를 수집·정리·번역하고, 콘텐츠화 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40종의 해제와 4종의 일기 번역을 호남기록문화유산 누리집(www.memoryhonam.co.kr)에 탑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자료를 쉽게 접하여 읽을 수 있도록 해제와 번역을 하였고, 영원히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점의 이미지도 제공하고 있다. 일반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일기자료를 우선 대상으로 하여, 학술적으로도 기여를 하고자 한다.

이 일기 자료를 통해 독자들은 호남인이 어떤 인성과 의식을 가지고 생활을 영위해갔으며, 주변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고 역할을 하며 살아갔는지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연구자들은 지역사에 있어서 미시적인 접근이 더 쉬워지고, 우수한 문화콘텐츠를 다양하게 가공하여 생산해 낼 수 있다. 한 마디로 우리를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고 다각도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호남지역은 개항 이후에서 오늘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 전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 의병, 독립운동, 수탈, 건국,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등에서 그러하였다. 그래서 호남 사람들은 그 때마다 보고들은 것을 일기에 담아 놓았고 그런 일기들이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다. 심지어 5⋅18 때에 초등학생이 적어 놓은 일기도 있다.

농도여서 농촌 어르신이 평생 적은 농사일기도 있고, 간척지 공사를 할 때 적은 일기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그런 근현대사 일기를 발굴하여 번역하고 그것을 토대로 역사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각계각층의 지원이 필요하고 막대한 예산도 소요된다. 바로 이런 일에 우리 연구팀이 일조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작업은 일기를 해제하는 것과 번역하는 것이다. 그 번역 작업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신재일기(日新齋日記)」는 정의림(1845~1910)이 1897년 1월 1일부터 1902년 12월 27일까지 6년 동안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생활일기로, 매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날씨, 신변기사, 사회적 행사, 관변기사는 물론 당시 사회상을 드러내는 화적(火賊)이나 민란(民亂) 따위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상 및 항일의병활동 등을 들은 대로 기록하고 있다.

사건을 기록한 내용은 주로 ‘전문(傳聞)’과 ‘목견(目見)’이라는 단어를 첫머리에 쓰고 있는데, 전해들은 소식은 ‘전문’이라고 표현했고,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은 ‘목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전문의 경우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도 있고, 유언비어가 매우 많이 떠돌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유언비어가 많이 떠돌게 된다. 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휘청거리는 국가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다.

일기 속에서 날씨 상황이 거의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는데, 맑은 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비가 오거나 비올 조짐을 보이는 천둥이나 번개에 대한 기록만이 있다. 즉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비가 얼마만큼 오는가가 중요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신재 일기에는 일상생활에 대한 기사뿐 아니라 문학작품인 시문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중 시는 100수 가량이 실려 있다. 이중에는 다른 사람의 시도 포함되어 있다.

문장으로는 <中庸問對>, <中庸綱目條理圖>, <中庸綱目條理圖說>, <大學問對>, <大學綱目條理圖>, <政術問對>, 理氣 등의 <雜著>, <書存齋先生思成錄後>, <治病策>, <蜂虎說>, <月令>, <全羅道通文>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문은 그의 문집에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것들이다. 특히 <中庸問對>, <大學問對>, <政術問對>의 글은 정의림의 경학에 대한 깊이와 경세사상 등을 알 수 있는 귀한 글이다.

이 일기는 정의림의 사후에 바로 잊혀진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994년에 변시연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변시연의 서문과 김규호의 발문을 부쳐서 『고문연구』 제7호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요한 대목을 예시하면 1897년 7월 5일. 서울소식을 전해 들어보니, 경성에서 인천까지 산을 뚫고 구덩이를 메워서 똑바로 일자가 되게 길을 만들고, 그 위에는 또 양철로 깔아서 자동차용으로 단숨에 왕래하게 한다고 한다.

또 전해 듣자니 팔도의 의병의 선비들이[전라도는 들어가지 않았다]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은 후에 인산의 일로 상소를 하였는데, 왕의 거소를 모르기 때문에 끝내 왕이 상소문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혹은 주상의 외명이 비록 경운궁에 있기는 하나 사실은 러시아 진중으로 이어하였다고 한다. 전해 듣기로 동래동관을 러시아인이 빼앗아 살고, 날마다 1천냥을 헤아려서 왜인에게 상납한다고 한다. 전해 듣기로, 각 고을의 세전은 그 고을사람이 동래관에서 곡식을 사고파는데 그 값은 곧 지전으로 한다고 한다. [가령 천냥은 지전으로는 300냥인데, 우리 돈으로 거두고] 이것으로 상납한다고 한다. 이슬비.

初五日. 傳聞京奇, 則自京城至仁川, 鑿山補坎, 直爲一字路, 其上又布洋鐵, 只以用車一刻往來云. 又傳聞, 八道義兵之士[全羅道不入], 以國母報讐後, 引山事上疏, 而未知王所, 故終未得乙覽云, 或者主上外名雖在慶運宮, 其實移御峨陣中云. 傳聞, 東萊東館, 峨人奪居, 而日之料一千兩, 而倭人上納云. 傳聞, 各邑稅錢, 其邑人貿谷而商於東萊關, 則其價卽紙錢也[假令千兩, 紙錢則三百兩, 以我錢加捧], 以此上納云. 雨細.

1897년 7월 28일. 아침에 이슬비가 내렸으며, 사시와 오시에 이르러서는 크게 내렸고, 천둥과 번개가 동반하였다. 전해 듣자니, 화순, 동복, 광주 등지에는 23일에 내린 비로 골짜기와 구릉이 바뀌었으며, 광주 증심사는 산사태로 무너졌고, 강진의 병영의 물도 또한 그렇다고 한다.[을미년과 같다]
二十八日. 朝雨細, 而至于巳午時雨方大, 而有雷且電. 傳聞, 和順同福光州等地, 二十三日雨, 谷遷陵移, 光州盡心寺頹壓[山汰], 而康津兵營, 水亦然云. [如乙未]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