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3)
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3)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11.1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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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사암 박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박순은 승승장구하였다. 1569년 7월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1572년 7월에 영의정 이준경이 죽자 우의정이 되었으며 157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내리 7년간 재직하였다.

그런데 영의정 이준경은 1572년 7월7일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을 유언으로 올려 붕당의 조짐을 알렸다. 심의겸 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선조가 누가 붕당을 만드는가를 물었을 때 심의겸과 이이 등은 강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준경의 예견대로 1575년에 붕당이 현실화 되었다. 사림이 분열한 것이다. 붕당은 이조전랑을 둘러싼 심의겸(서인)과 김효원(동인)의 충돌이 발단이었다.

이어서 황해도 재령에서 주인을 죽인 노비 재판 사건으로 박순과 허엽이 노골적으로 알력을 하면서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 서경덕에게서 동문수학한 박순과 허엽은 결별하였고 박순은 서인의 영수, 허엽은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1578년에 삼윤(三尹) 사건이 일어나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경연에 입시한 동인의 김성일이 진도군수 이수가 서인의 중진인 윤두수 ․ 윤근수 형제와 그들의 조카 윤헌에게 쌀 수 백석을 뇌물로 바친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세 사람은 뇌물수수 혐의로 파직되었다.

한편 율곡 이이(1536-1584)는 동인과 서인의 중간에 서서 조정을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이이의 화해 노력은 별 효과가 없었다. 동인에게는 서인을 편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583년 여름,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함경도 종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긴박하자 이이는 임의로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이이가 병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교만하게도 임금을 무시하였다’하여 이이를 탄핵하였다.

이 탄핵은 박근원 ․ 송응개 ․ 허봉 등 동인이 주관했는데, 이들은 박순 ․ 이이 ․ 성혼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고 공세를 확산시켰다.

서인은 일대위기였으나, 조정에서 이이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를 두둔하여 상소를 올렸고 선조도 이이와 성혼을 지지하였다. “나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고 싶다고”하면서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와 지조가 있고 물과 달 같은 정신이 있다 松筠節操 水月精神 ”고 하면서 신임을 보였다. 이를 보고 논박하는 자들은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일컬었다.

선조는 동인의 송응개, 허봉, 박근원을 각기 회령, 갑산, 강계로 유배 보냈다.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계미삼찬 이후 서인은 다시 정국을 주도하였다. 선조는 이이를 이조판서에, 성혼을 이조참의에 임명하였다. 영의정 박순이 선조에게 천거한 결과였다.

그러나 서인 세상은 잠시였다. 1584년 1월16일에 율곡 이이가 나이 49세에 별세하였다. 성혼은 사직하고 파주로 귀향하였다. 박순만 홀로 조정에 남았다.

그런데 선조는 1585년 2월에 귀양 간 박근원 ․ 허봉 ․ 송응개를 사면하였고 동인들을 더 많이 등용했다. 동인들은 박순 ․ 정철 ․ 윤두수 등 서인들을 연일 탄핵하였다. 마침내 1585년 9월에 선조는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서인의 몰락이었다.

박순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름뿐인 벼슬자리였다. 이후 박순은 홍문관 수찬 정여립의 탄핵을 받아 영중추부사 자리마저 물러나 용산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

1586년 7월에 박순은 경기도 영평(지금의 포천시)으로 아예 은거하였다. 선조는 박순에게 동대문 밖 보제원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주면서 사직하지 말고 몸조리 후에 다시 돌아오라고 하였다.

박순은 이별시를 부채에 써서 선조에게 보냈다.

 

은혜에 보답할 재주 없음이 마음에 거리껴                    答恩無路寸心違,

쇠잔한 몸 추슬러 시골집으로 돌아가나이다.                      收拾殘骸返野扉.

종남산이 한 점 되어 갈수록 멀어져 가는 데                  一點終南看更遠,

서풍에 눈물 흘려 칡넝쿨 옷(碧蘿衣)을 적시나이다.              西風吹淚薜蘿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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