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1)
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10.1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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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연재를 시작하면서

왜 길 위에서 호남 선비를 만나려 하는가? 호남 선비로부터 호남인의 정체성(正體性)과 자긍심을 배우기 위함이다.

16세기 중엽에는 기라성 같은 호남 선비들이 너무 많았다. 가장 먼저 만나는 이는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이다. 그는 성호 이익으로부터 ‘사암능양(思庵能讓)’이란 칭송을 받았다.

광주 송호영당에서

길 위에서 선비를 만난다. 가는 곳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용아 박용철(1904∼1938) 시인 생가 뒤에 있는 송호영당이다. 이곳에는 기묘명현 눌재 박상(朴祥 1474∽1530)과 사림재상 박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박순 영정

박순 영정은 참으로 후덕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절제된 기품이 배어있다. 박순은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이다. 정승만 내리 14년을 하였고 영의정에 있던 기간이 7년이었다.

박순의 자(字)는 화숙(和叔), 호(號)는 사암(思庵)이다. 아버지는 개성유수와 전주부윤을 한 육봉 박우(1476∼1547)고, 큰 아버지는 기묘명현 눌재 박상이다. 할아버지 박지흥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자 충청도 회덕에서 살다가 광주로 은거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은 박지흥 처가 계성서씨(桂城徐氏) 마을 근처였다.

박우는 분가하여 부인 당악김씨의 향리인 나주 공산에 기거하였고, 1523년 10월에 나주에서 박순이 태어났다. 그런데 박순이 6세 되던 1528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광주 서모의 집에 맡겨져 컸다.

박순은 18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송도 3절중 하나인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에게 수학하였다. 박순과 같이 공부한 사람은 초당 허엽(1517~1580), 토정 이지함(1517~1578) 등이다.

1546년에 서경덕이 돌아가셨다. 1547년에는 부친 박우가 별세하자 박순은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박순은 절개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나이 31세인 1553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예관료가 된 후에도 조용히 지내면서 수양을 하였다. 이렇듯 수기(修己)를 한 박순은 의외로 빨리 이름을 알렸다.

1556년에 그는 중국 사행길에 들여오는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가 되었다.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압록강변 의주에서 박순은 밀수품이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건인줄 알면서도 가차 없이 압수해 버렸다. 대부분의 어사들이 왕실과 권신의 위세에 눌려 직무를 소홀히 하던 상황에서 박순은 엄격함과 과단성을 보인 것이다.

한편, 박순은 1561년 홍문관 응교 시절에 임백령 시호 사건으로 시련을 겪는다. 을사사화의 주역 임백령이 1546년에 죽자 이를 슬퍼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시호를 내리도록 명종을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임백령의 시호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높은 시호를 올리면 권세에 아첨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윤원형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므로 주저하고 있었다.

박순은 임백령이 큰 아버지 박상의 제자라는 인연을 생각하여 소공(昭)이라는 시호를 지어 올렸다.

‘이미 과오가 있으나 고칠 수 있다’는 소(昭)와 '모습과 거동이 공손하고 아름답다.’라는 공(恭)을 쓴 것이다. 윤원형은 격분했다.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에게 문(文)이나 충(忠) 시호를 올리지 않다니. 1545년 을사년 일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니. 이 사건으로 박순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나주로 귀향한다.

때는 1561년 5월이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도 이를 애석해 하였다. 이는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편지에 나온다. 주변 사람들의 동정이 많아서였을까. 박순은 그 해 12월에 한산군수에 임명되었다.

1565년 4월, 20년간 권력을 농단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별세하였다. 그녀는 조선의 측천무후라 불릴 정도로 나라를 주물렀다.

정국은 요동쳤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20년간 지속된 문정왕후의 세도가 그대로 유지될 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대사간 박순이 척결에 앞장섰다. 5월에 문정왕후가 병조판서로 임명한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더니, 8월초에는 대사헌 이탁을 설득하여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 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권력자 윤원형을 탄핵한 박순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이제 죽을 자리에 왔다'라는 각오로 탄핵했다.

그런데 윤원형은 한 번의 상소로 물러나지 않았다. 박순은 첫 번째 상소 11일 만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26가지나 상세하게 열거하면서 탄핵하였다.

명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외삼촌 윤원형을 파직시키고 유배 보냈다. 마침내 명종비의 인척 심통원 등 외척들마저 물러났고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박순은 사림의 리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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