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5)
길 위의 호남 선비-사암 박순(5)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11.2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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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사암 박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박순은 최고의 서정 시인이었다. 느낌대로 진솔하게 시를 잘 지었다. 1568년에 명나라 사신 장조와 구희직이 조선에 왔을 때 박순은 예조판서로 접빈사가 되었는데, 명나라 사신 장조와 구희직이 박순의 시를 보고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唐)의 격조”라고 칭송하였다.

성리학이 주류인 송나라 시대에는 시를 짓는 것도 격식을 따졌다. 그런데 박순은 투박 ․ 진솔하게 인간미 넘치는 당나라 풍조(唐風)의 시를 지었다.

이 중에서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 시이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자던 새가 알아듣네.

 

醉睡仙家覺後疑 취수선가각후의

白雲平壑月沈時 백운평학월심시

翛然獨出脩林外 수연독출수림외

石逕笻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참으로 명시(名詩)이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에 자던 새가 듣더라’는 시 구절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

‘숙조지(宿鳥知) 선생’이었을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온다.

박순은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1539-1583), 옥봉 백광훈(1537-1582)등 삼당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유희경(1545-1636)도 박순에게 시를 배웠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은 서얼이요, 부안 기생 매창의 연인 유희경은 천민 출신인데도 박순은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박순의 시 중에는 면앙정 30영 등 호남의 자연을 읊은 시도 많다.

면앙 송순(1493-1583)을 위하여 지은 면앙정 30영중에서 ‘서석산 아지랑이’를 읊어 보자.

 

수풀 밖으로 멀리 내다보니 바위 형세가 웅장하고

아지랑이 퍼진 기운이 개인 하늘에 가득하네.

술에 취한 붓 오래 멈추고 자주 머리를 돌려

저녁노을이 다시금 엷게 물들기를 기다리네.

 

1589년 7월에 박순은 경기도 포천 백운산 시냇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는 날도 베갯머리에 기대어 시 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갑자기 신음하더니 부인 고(高)씨에게, “내가 가오.” 하고는 홀연히 운명하였다. 박순은 창옥병과 금수정이 바라다 보이는 뒷산 종현산에 묻혔다.

박순과 가장 친했던 우계 성혼(1535-1598)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만시(輓詩)를 지었다.

 

세상 밖 구름 덮힌 산은 깊고 또 깊으니

시냇가에 초가집은 벌써 찾기 어려워라

배견와(拜鵑窩) 위에 뜬 한 밤의 달은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리.

 

世外雲山深復深 세외운산심부심

溪邊草屋已難尋 변계초옥기난심

拜鵑窩上三更月 배견와상삼경월

應照先生一片心 응조선생일편심

 

성혼은 앞의 2구에서 깊은 산골 영평 땅에 주인 없는 집만 남아 있는 모습을 그렸고, 뒤의 2구에는 배견와 위에 뜬 삼경의 달이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 같다고 표현하였다.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1569-1618)은 <성수시화>에서 “박순이 돌아가시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특히 성혼의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라고 하면서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담양 송강정에서 지내고 있는 송강 정철도 박순의 부음을 듣고 이렇게 통곡하였다.

 

나는 떼를 잃은 기러기 같네.

이 몸을 어느 곳에 의탁하리오.

외로이 나는 갈대밭 사이에

그림자 찬 구름과 함께 사라지도다.

 

서인의 영수 박순마저 죽었으니 서인들은 길 잃은 기러기였다.

박순은 적통(嫡統)에게서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다. 그는 딸아이가 꽃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너무 예뻐 시를 지었다.(觀女兒弄花戱題)

 

딸아이 똘망똘망한 게 겨우 젖 떨어져

예쁘게 빨간 치마 입고 마냥 좋아하는구나.

웃으며 해당화 한 잎을 따서는

귀여운 이마에 부치고는 연지라고 하네.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근처의 옥병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옥병서원 앞 신도비의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아울러 광주광역시에 송호영당,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월정서원에도 박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선조시절 14년간 내리 재상을 한 박순. 너무 겸손하여 성호 이익으로부터 ‘사암능양’이란 명성을 얻은 절창의 시인 박순. 그는 정녕 겸손과 진솔의 표상이었다.

▲ 옥병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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