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8) 해양음사와 《운림당시문집》
호남기록문화유산(18) 해양음사와 《운림당시문집》
  • 서성우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5.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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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창작된 한시(漢詩), 각 지역의 풍경과 시대상 반영해 큰 가치 지녀”

호남지방문헌연구소(책임자: 전남대 국문과 교수 김대현, 062-513-8033)’20162월부터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 호남지방문헌연구소로 개칭하였으며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www.honamculture.or.kr)2002년 설립되어 호남지역의 고문헌 자료를 발굴·조사·정리하고 DB화하며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고문헌 자료 중에서도 핵심자료인 문집(文集), 지방지(地方誌), 문중문헌(門中文獻)을 중점적으로 조사·연구하며, 연구 결과물은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이트(www.memoryhonam.co.kr)’에 탑재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귀중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DB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자문 부탁드립니다.

▲ <운림당기>, <운림당원운과 팔경시>, <해양음사취지서와임원록>
1930
년대 광주의 대표 8경은 무엇이었나?
 
얼마 전 오는 6월 광주시립극단에서 <신시야화(新市夜火)>라는 공연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공연의 배경되는 곳은 바로 1930년대의 광주 충장로인데, 예전 모습을 그대로 재현된 극장과 배우들의 분장모습을 상상해보니 더욱 관심이 생겼다.
 
<신시야화>1930년대 최석휴(崔錫休)가 지은 팔경시(八景詩) 중에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다. 이 팔경시는 한시로 되어 있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들과 함께 해양음사라는 시사(詩社)에서 창작된 시를 모아 엮은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이 지은 운림당(雲林堂)에서 당시 시내의 밤풍경을 묘사한 <신시야화(新市夜火)>라는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新市夜火(신시야화) 신시가의 밤 불빛
 
如星如月復如神 별빛인 듯 달빛인 듯 신령스러워
夜雨蕭蕭色正新 소소한 밤비에도 빛은 새롭구나
天上人間通用電 천상과 인간에 전기가 통용되니
見之非假想非眞 보고는 있으나 꿈인지 생시인지
 
최석휴는 당시 일제강점기에 광주의 병천사를 지은 지응현, 광주극장을 지은 최선진, 정낙교 등과 같이 지역을 대표하는 부호 중 한 명이다. 그는 운림당에서 늘 시내를 바라다보곤 하였을 것이다. 불이 켜진 밤에 시가를 내려다 본 풍경을 읊고 있다. 그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촛불이 아닌 전기불을 접하니 왜 신기해하지 않았겠는가. 별빛달빛처럼 찬란한 밤의 야경은 여러 번 보아도 믿기지 않은 황홀한 풍경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치 지금의 각 지역에서 축제 때 행하는 불꽃축제처럼 말이다.
 
▲ 남농 허건의 <운림당전경도>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운림당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아쉽게도 운림당은 현재 전하지 않아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운림당시문집에 수록된 <운림당기(雲林堂記)>에 의존해 보면 대략적인 위치는 짐작할 수 있다. 즉 기문에는 광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선원동(仙源洞)에 운림당이 있고, 가운거사(可雲居士) 최석휴(崔錫休)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운곡(雲谷)과 홍림(洪林)이 서로 비치고 어울려 있어 운림당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운곡홍림은 운림당을 기준으로 좌우에 있었던 마을 이름인데, 광주군 지한면과 부동방면(不動坊面)에 각각 속했던 지명이다. 구한말을 거쳐 19144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한면의 운곡리와 신림리는 운림리로, 지한면의 주곡리와 미양리는 홍림리가 되어 지한면의 관할이 되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광주 동구의 운림동이다.
 
운림당시문집에는 조선후기의 저명한 화가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손자로, 아버지 미산(米山) 허형(許瀅)을 이어 호남화단의 맥을 3대 째 이어온 남농(南農) 허건(許楗)이 그린 <운림당전경도(雲林堂全景圖)>가 있는데, 운림당의 위치와 팔경에 해당하는 곳을 좀 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최석휴가 말하는 8경인 <신시야화(新市夜火)>를 비롯하여, <선원벽화(仙源碧花)>, <경수홍우(鏡水紅藕)>, <창아모연(蒼鴉暮烟)>, <황계효월(黃鷄曉月)>, <남정장적(南亭長笛)>, <소사한종(蕭寺寒鐘)>, <고단설림(古壇雪林)> 등이 명시되어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지금은 비록 새월의 변화로 인해 찾아 볼 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최석휴가 바라 본 당시의 감정과 일치시키기에는 무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운림당시문집에는 8경시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작품을 통해서 당시의 풍경을 상상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며,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옛 문헌을 통한 과거와의 소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양음사에서 활동한 회원들
▲ 운림당시문집 표지
 
시사에서 간행한 시문집을 통해서 함께 활동한 회원 및 시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볼 수 있다. 운림당시문집을 보면, 서문을 쓴 석사(石史) 기동설(奇東卨),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권익상(權益相), 송파(松波) 고광수(高光洙) 등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은 작품을 통해서 보면,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수 있는 이기호(李起澔), 윤영기(尹永淇), 최종섭(崔鍾涉), 하석규(夏錫圭) 등이며, 광주 학생운동을 대표하는 운인(雲人) 송홍(宋鴻)의 작품도 있어 눈여겨 볼 만 하다.
 
운림당시문집<海洋吟社趣旨書及任員錄>에는 부귀를 구할 수 있다면, 비록 마부의 일이라도 하겠지만, 부귀를 구할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仲尼有言,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可爲也, 如不可求, 從吾所好]”라고 말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 시사의 취지를 밝히고 있어 시사를 결성한 목적도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사의 의미
 
시사는 애국계몽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도 해양음사를 비롯하여 여러 시사들이각 지역에서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말하는 문학 동인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그 구성원에 따라 그 시사의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 만큼, 그 내용도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즉 활동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만큼 전통유림들과 친일유림들, 일본 경찰 그리고 그들과 교유한 지역의 유지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흔히들 한문학활동은 매천(梅泉) 황현(黃玹) 이후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고는 있지만, 근래에 일제강점기의 언론매체에 실린 한시 및 관련 활동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계속해서 근대의 한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며, 그 연구의 시작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시사가 아닐까 한다.
 
과거에 지역적으로 활동했고, 또 미약하나마 활동하고 있는 시사의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시사원들이 활동하면서 창작된 시를 모아 편찬한 운림당시문집과 같은 시문집이다. 여기에는 시사원들의 작품과 인명, 시사원들을 파악할 수 있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당시의 각 지역의 풍경과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과거의 문헌인 만큼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연구실에서는 시사에서 편찬한 시문집을 시사지(詩社誌)’ 범주로 놓고, 크게는 지방지로 분류하여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수가 적어 깊은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시사지 및 시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소장하고 계시면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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