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2
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4.17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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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근대 여성운동의 활동
부당함에 맞서 싸운 댕기머리 소녀들
대한민국은 지난 50여 년간 세계가 부러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나라이다. 그런 가운데 유교적 사회 환경 속에 여성은 강요된 틀 속에 갇혀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살아왔다고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보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여성만의 정체성을 찾고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당당한 역사적 주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시민의소리>는 그동안 남성 위주의 서술에서 벗어나 광주·전남의 발전을 위해 피땀 흘린 ‘여성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회. 프롤로그 -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2회. 광주 근대 여성운동의 활동 (3.1만세운동, 항일학생독립운동, 해방후 여성운동)
3회. 부산여성운동 활동 (대표 독립운동가 박차정)
4회. 광주 현대 여성운동의 활동 (5.18민주화운동, 실존인물 증언)
5회. 현재 광주전남 여성 관련 단체 활약
6회. 미얀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7회. 미얀마 양곤 민주화 운동 (아웅산 수지 여사)
8회. 에필로그 - 여권 신장으로 여성친화도시 나아가는 광주

   
 
▲올해 수피아여고에서 펼쳐진 3·1만세운동 재연행사
20세기 수동적인 삶을 살던 여성들이 능동적인 주체로 등장해 여성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1903년 목포항이 개항한 이후 여성들도 교육을 접하게 되면서부터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여성교육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전남 최초의 여성학교인 목포정명학교가 설립되고, 1908년 광주 최초 여학교인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교육을 처음 접하게 된 여성들은 일제의 부당함을 깨닫기 시작하고, 이에 맞서기 시작한다.

비밀리에 독립선언문·태극기 제작

1919년 3월 10일 발생한 만세운동은 여학생들이 치마로 태극기를 만들고 항일 운동에 뛰어든 대표적 예다. 또한 1929년 11월 3일에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남녀 성별에 구분 없이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매개체였다.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수피아여자고등학교를 찾았다. 앳된 얼굴을 한 여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이 한창이었다. 100여 년 전 광주 최초 여자학교였던 이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시간은 1919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여학생들은 늦은 밤 수피아홀 기숙사 지하실에서 몰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1만세운동하면 누구나 유관순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광주에는 1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수피아 여학교 출신 최연소 독립투사 최현숙(최수향), 왼팔이 여선생 윤형숙(윤혈녀), 김안순, 박애순 여선생 등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수많은 여성독립 운동가를 찾을 수 있다.

현재 수피아여자고등학교 박정권 교장은 “여성 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선배들의 정신을 받들기 위해 학교측에서는 매년 3·1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하고 있고 학생들에게 정의로운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며 “광주에 여학생이 참여한 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주화운동 등도 있지만 3·1운동이야 말로 목숨을 내걸고 일제의 총·칼에 대항했던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고 설명한다.

이어 박 교장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나 5.18은 대단히 큰 행사를 마련하고 관련 학교 출신 인물들이 국회의원이나 정계에 진출하는 모습을 봤지만 이보다 더 먼저였던 3·1만세운동에 대해서는 단순히 재연행사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

▲올해 수피아여고에서 펼쳐진 3·1만세운동 재연행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은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은 다름 아닌 나주역 ‘댕기머리 소녀’사건이었다. 당시 여학생들은 단정하게 땋아 내린 댕기머리를 하고서 등교했다.

그러던 1929년 10월 30일 등교하는 통학열차 안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일본인 학생 후쿠다가 광주여고보(光州女高寶, 현 전남여고)에 다니던 한국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의 댕기머리채를 잡아당기고 희롱을 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박기옥 사촌동생 박준채(광주고보2)는 항의를 했지만 후쿠다는 “조센징 주제에 감히”라는 말을 던져 참고 있었던 민족적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이후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이 삽시간에 집단으로 커져갔다. 결국 광주역 앞에서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했다. 당시 광주여고보 여학생들은 댕기머리를 잡혀 수모를 겪은 여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치마에 돌멩이를 싸들고 일제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은 거친 투쟁 현장 속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남학생들에게 물을 떠주고 붕대로 상처를 감싸주며 부당함에 맞섰다.

이러한 사건이 대규모로 커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어느 여학생의 활약상이 있었다. 당시 광주여고보 3학년 반장이었던 최순덕은 ‘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말자! 연필도 잡지말자! 시험지를 받으면 그대로 덮고 운동장으로 나가자!’라는 호소문을 손수 자필로 150장을 작성해 여학생이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주도했다.

유일한 산증인 아직도 인정 못 받아

현재 최순덕 선생은 103세로 유일하게 살아있는 학생독립운동의 마지막 산증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국가보훈처에서는 증거불충분, 활동부족이라는 통보로 독립유공자 인정해주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에 인터뷰했었던 최 선생은 “올바른 것을 인정해주고 헛된 것을 잡아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정부에서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며 “사실 확인조사도 하지 않고 의문조차 갖지 않는 나라의 대응이 서글프다”며 떨리는 목소리를 힘주어 말했었다.

최근 전화통화를 통해 아직까지도 국가보훈처에서는 별다른 전달 사항이 없고, 최순덕 선생은 점점 노령의 나이로 건강마저 쇠약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여학생들이 항일운동에 참가한 이유는 시대 상황으로 인해 해방을 외치는 분투도 있었지만, 보다 더 나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시대적 불합리를 극복하기 위한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김다이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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