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3
21세기에 바라본 광주 근·현대 여성운동 -3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4.25 0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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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성운동 활동 - 독립운동가 박차정
군복입고 ‘항일해방운동’ 펼친 여장부
대한민국은 지난 50여 년간 세계가 부러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나라이다. 그런 가운데 유교적 사회 환경 속에 여성은 강요된 틀 속에 갇혀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살아왔다고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보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여성만의 정체성을 찾고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당당한 역사적 주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시민의소리>는 그동안 남성 위주의 서술에서 벗어나 광주·전남의 발전을 위해 피땀 흘린 ‘여성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회. 프롤로그 -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2회. 광주 근대 여성운동의 활동 (3.1만세운동, 항일학생독립운동, 해방후 여성운동)
3회. 부산여성운동 활동 (대표 독립운동가 박차정)
4회. 광주 현대 여성운동의 활동 (5.18민주화운동, 실존인물 증언)
5회. 현재 광주전남 여성 관련 단체 활약
6회. 미얀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현주소
7회. 미얀마 양곤 민주화 운동 (아웅산 수지 여사)
8회. 에필로그 - 여권 신장으로 여성친화도시 나아가는 광주

   
 
누군가의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만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찾아간 곳에 그녀는 없었다. 다만 그 설레이는 만남을 대신해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자리한 여성독립운동가의 복원된 생가를 찾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여성의 신분으로 직접 총칼을 메고 항일운동에 앞장선 박차정(朴次貞)의사의 생가였다. 그녀는 무장항일투쟁은 물론 근우회 활동으로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여장부였다.

처음 박차정 의사의 생가는 조카 박의영씨가 직접 거주하면서 생가를 관리하고 보전했으나 관람객들의 자유로운 관람과 개인 주거생활의 충돌로 인해 현재는 박차정의사 숭모회 후원금으로 관리, 운영되고 있었다.

항일 분위기 강한 가정환경에 자라

생가의 분위기는 한옥의 깔끔함과 예스러움 그 자체였다. 복원된 생가의 작은 방에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1995년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받은 훈장증과 독립운동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 부모님 사진 등 박차정 의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현재 부산 동래구)에서 아버지 박용한 선생과 어머니 김맹련 여사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주목할 점은 박차정 의사는 태생부터 항일 분위기가 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러한 탓에 자연스레 항일민족의식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김두전, 김두봉과 친척인 어머니,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숙부 박일형, 신간회, 의열단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작은오빠 박문호의 뒤를 이었다.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회 강대민 이사장(경성대 교수, 박차정의사숭모회 부회장)은 “박차정 의사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노인변장을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박차정 의사는 1925년 부산 여성교육의 산실이자 항일여성운동을 선도했던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에 입학하고 항일 의식을 키워갔다. 당시 그녀는 문학에도 재능이 있어 문학을 통해 민족해방을 울부짖었으며,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부산 동래구 칠산동 박차정 의사 생가에 보관중인 1995년에 받은 훈장증.
▲부산 동래여자고등학교 행정실을 찾아 학적부에서 박차정 의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우회 활동으로 민족해방운동 시작

이후 1929년 3월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전국적인 여성운동 기관인 근우회를 시작으로 민족해방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같은해 7월 서울에서 열린 근우회 전국대회를 통해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핵심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강 이사장은 “박차정 의사는 반봉건체제, 계급사회에서 여성평등, 여권신장을 위해 독립운동을 펼치는 분이었다”며 “문학적 소질도 뛰어났던 박 의사는 삐라와 라디오 선전에도 많은 역할을 하고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분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그녀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당시 ‘광주학생석방 만세’, ‘피압박민족 만세’, ‘약소민족 만세’등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일경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했다. 석방 이후 국내에서 해방운동의 한계를 느꼈던 박 의사는 중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하고 있는 둘째 오빠 박문호에게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박차정 의사와 남편 김원봉 선생
이곳에서 박차정은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1931년 결혼을 하게 된다. 또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임철산’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으로 활동하며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1936년에는 민혁당 창당 이후 민족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동시에 주장했다.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도 활동을 하며 직접 여성의 몸으로 군복을 입고 사기진작과 선전활동에 매진했다.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회 강대민 이사장(경성대 교수, 박차정의사숭모회 부회장)
국립묘지 안장 못돼 안타까워

그러다 1939년 곤륜산 전투에 직접 참전을 했던 박차정 의사는 큰 부상을 입게 됐다. 이후 후유증과 관절염에 시달린 끝에 결국 조국해방을 얼마 남겨두고 1944년 5월 27일 3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사후 박차정 의사는 중국 화상산 조선인독립군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남편 김원봉의 고향 경남 밀양 감전동 뒷산에 옮겨지게 됐다. 그녀는 남북분단으로 한국의 정치현실 속에서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5년 한국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써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묘지는 초라하기만 하다. 밀양시의 독립유공자 처우 개선, 남편 김원봉의 가족과의 마찰 등으로 국립묘지로 옮겨지지 못해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이후 1996년 설립된 박차정 의사 숭모회의 활동으로 무관심의 그늘에 가려진 박차정 의사의 활약상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산 금정구 금정문화회관 만남의 광장에는 군복을 입은 박차정 의사 동상이 호기롭게 서있다. 박 의사의 애국심과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이 더욱 빛을 발하게 하는 듯하다.

한편 오랫동안 박차정 의사에 대해 연구해왔던 강대민 이사장은 “부산에도 여성 관련단체가 많이 있지만 여성운동과 관련하여 롤모델이 누구냐고 물으면 답을 못하기도 한다”며 “말로만 여성운동을 하지 말고 ‘박차정 의사’처럼 여권신장을 위해 몸소 뛰어들어 실천하며 이론과 일치하는 여성운동을 했으면 한다”고 바라고 있다./김다이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금정구 만남의 광장에 위치한 박차정 의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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