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길을 찾다 제1강]
빈자의 미학 아시아의 터
[아시아에서 길을 찾다 제1강]
빈자의 미학 아시아의 터
  • 편수민 기자
  • 승인 2011.03.21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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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축과 개발 여유의 미학과 윤리 있어야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아시아의 문화이해’ 공개강좌 마련
제1강 빈자의 미학 아시아의 터
-승효상 2011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사진출처: 광주 mbc 제공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 광주지역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아시아 문화이해를 위한 공개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17일부터 문화전당역 앞 아시아문화마루(쿤스트할레)와 광주교대 대강당에서 모두 6회에 걸쳐 격주 목요일로 진행되는 이번 공개강좌는 ‘아시아에서 길을 찾다’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시민의 소리>는 독자를 위하여 이번 강좌를 매 회마다 현장의 소리를 전달한다.<편집자 주>

쿤스트할레는 100여명의 참석자들로 붐볐다. 매 강좌마다 강의에 앞서 공연이 마련되어 문화행사가 재미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야금,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보컬 등으로 구성된 ‘퓨전국악단 루트머지’가 맘마미아, 여우비 등의 곡을 선보였고 동서양이 어울려진 아름다운 선율을 뽐냈다.
서경주 광주MBC 사장과 박남기 광주교대 총장은 인사말을 통해 “아무리 산업이 발전해도 문화의 발전이 없으면 자존심도 없다”며 “이 자리가 광주에서 길을 찾는 첫출발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행사취지와 소감을 밝혔다.

지난 17일 ‘아시아의 문화이해’ 공개강좌의 첫 강연을 '승효상' 감독이 맡았다.

승효상 총감독은 “첫 번째라 영광이지만 부족한 자신이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걱정이다”며 운을 떼었다. 건축가 출신답게 다양한 건축물 도판을 보여주면서 비교설명을 해주었다.

세계의 중심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조선시대 16세기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집은 건물의 칸수만 정하고 담과 공간으로 한정된 ‘관계에 의한 설계’라 칭했다. 동 시대의 이탈리아 비첸차[Vicenza] 지역의 서양건축의 기초가 되는 건물의 사진과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은퇴한 가톨릭 사제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설계도에서 바깥세상을 감시, 관측, 지배, 제어하는 모습을 알 수 있고 ‘우주의 중심에 내가 있다’라는 서양 건축의 사상의 단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승 감독은 서양의 투시도 관련 사진을 보여주면서 서양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중심으로 집약되는 ‘소실점’을 말했다. 소실점에 서지 않은 다른 이와 앵글을 공유하지 못하고 한사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어 자신의 세계를 타인이 볼 수 없음을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19세기에 책꽂이를 그린 민화를 보면 하나의 그림임에도 각 칸마다 시점이 다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적어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세계의 중심이 하나가 아니다’라는 사상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서양 도시 계획도에서도 건축사상을 엿볼 수 있다했다. 가운데 중심에 봉건영주가 사는 ‘단일 중심 도시’ 이념을 알 수 있는 계획도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상도시’라는 믿음에 의한 설계라 말하며, 불규칙을 보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비롯된 기하학적 도시설계로 서양의 건축관과 사상을 잘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c 한양 지도 vs 20c 서울 지도


지도에도 풍요와 여유로움을 깃들게

이어서 그는 87년에 스케치된 그림 한 점을 내보였다. 고층의 건물이 빽빽이 자리 잡고 남은 공간에 녹지가 조성된 지금의 아파트 광고와 비슷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지금은 흔한 이미지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그림이었다 한다.
이 그림에서 보듯이 현대에 와서 땅을 기능상으로 나누고 용도지역으로 구분을 한 ‘마스터플랜’ 이라는 개념이 전 세계로 퍼졌다. 인간이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과 2차대전 이후 재건을 위해 ‘마스터플랜’ 이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도시계획을 기초로 지어진 규격화 되고 표준화 되어 지어진 대표적인 초창기 건물은 10년 만에 사람들에 의해서 폭파 되었다고 한다. 모더니즘의 병폐 중 하나인 익명성을 담보하여 범죄가 발생했다 한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폐해로 ‘마스터플랜’은 서양에서는 폐기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이미 전이되어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우리나라 서울의 지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 지도는 지도지만 한 폭의 산수화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20세기 서울지도를 보면 이 시대의 풍경을 전혀 알 수 없다. 어느 곳이 산이고 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다만 도로는 붉은색으로 표시되고 땅의 용도에 따라 색으로 나누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화와 타협이 보이지 않는 대립구조의 지도 모습이다. 오늘날 범죄와 분란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21세기 출발점에 개최된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가 “덜 미학적인, 그래서 더 윤리적인(The City ; Less Aesthetics, More Ethics)”을 주제로 삼았다. 지난 몇 십년간 우리는 우리의 ‘윤리’를 버렸는데 서양은 ‘오브제 중심’에서 ‘관계’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도시는 일상에 있다. 랜드마크가 아닌 골목, 건물,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존재 보다는 생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도시를 만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보하고 변화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아시아건축의 ‘윤리’ 와 ‘조화’를 강조

‘이미지보다는 서사’, ‘미학보다는 윤리’, ‘존재보다는 생성’, 우리 선조들이 말하던 가치들이다. 어찌 보면 반가우면서 그것들을 소외시켰던 우리를 허탈하게 만든다. 서양은 평지에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 ‘랜드마크’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자연이라는 멋진 랜드마크가 있다.
조선시대 개국 초 수도를 정할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배산임수’ ‘아름다운 산세’를 보고 도시를 정했다.
승 감독은 “터무니없다 는 말이 있는 데 터-무늬는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면서 “현대 아파트들은 원래의 지형을 다 없애고 건설을 한다. 터-무늬 없는 것이다.”라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이던지 건축은 결국엔 사라지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영구적인 것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이다. ‘건축의 윤리’, ‘도시의 윤리’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시작된 오랫동안 우리의 버팀목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마지막에 “나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실무 건축가다. 그래서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면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상처 받을 필요는 없다. 저 사람은 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승 감독의 강연 마감은 이러했다. “미학보다는 윤리를, 지배보다는 조화를 강조한 아시아의 건축이 세계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가짐보다 쓰임이, 채움보다 비움을 강조하는 지혜가 우리 도시와 건축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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