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9)-서하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9)-서하로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07.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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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로는 국립박물관입구 오거리에서 시작하여 매곡동, 오치동, 문흥동, 두암동 문흥지구입구 삼거리까지 총연장 4,769m로 북구에 있는 각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하로와 만나는 길들

서하로는 운암동과 양산동을 잇는 하서로와 만나는 국립박물관오거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국립광주박물관은 1978년 12월에 개관한 이후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유물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요즘은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어 아이들에게 역사교육과 함께 주말나들이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2007년에는 교육관을 신축하고 어린이 박물관을 신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소재지는 광주 북구 하서로 110(매곡동 산 83-3번지)이다.

▲ 비엔날레관 입구 교차로

하서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비엔날레관입구교차로가 있다. 약간 굽어진 길이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비엔날레관 및 시립민속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온 좌회전 차량들이나 건널목을 건너는 행인들은 주의를 해야 할 곳이다.

비엔날레입구교차로를 지나 굽이를 돌면 김용학 가옥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서하로에서 400여m 하백로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인 ‘김용학 가옥’을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의 한식 건물로 살림집과 정자가 언덕진 대지 위에 조화 있게 배치된 가옥이다. 건물의 배치는 동북쪽이 낮고 남서쪽이 높게 된 지형을 살려 낮은 동북쪽에 안채와 사랑채를 동서중심축으로 배치하였다. 주거 공간의 왼쪽에 연못과 하은정(荷隱亭)을 두었으며, 그 왼쪽 뒤편에 연파정(連坡亭)을 두었다. 2개의 누정은 모두 동향으로 배치하여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했다. 소재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하백로29번길 24(매곡동 306)이다.

이 곳을 지나면 사람들과 차량들로 북적거리는 길이 시작된다.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북부경찰서앞 사거리

용봉지구와 매곡, 오치, 일곡지구를 이어주는 설죽로와 만나는 북부경찰서앞 사거리는 차량들이 항상 많이 다니는 교통의 요충지다. 이 곳을 지나면 우치로와 만나는 오치사거리를 지나게 된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전남대를 지나 오치한전을 거쳐서 온 차량들이 매곡동과 오치로 가기 위해 출퇴근길에는 항상 막히는 곳이다.

송월로와 연결이 된 북부소방서사거리, 대천로와 연결된 문흥사거리를 지나면 호남고속도로 위를 지나가게 되는 문화육교를 넘어 동문대로와 만나는 문흥지구입구 삼거리에서 서하로가 끝을 맺는다.

 

조선시대 문인 서하 김성원

▲ 식영정

서하로는 조선시대의 문인 김성원의 호인 ‘서하’에서 따 와 명명된 길이다.

김성원(1525년 중종 20년∼1597년 선조 3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자는 강숙(岡叔)이며 호는 서하(棲霞), 또는 인재(忍齋)이다. 광주의 충효리(옛 석저촌)에서 병절교위를 지낸 아버지 김홍익과 어머니 해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11살 연상의 처외재당숙이다.

서하당 김성원은 환벽당(環碧堂) 김윤제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김윤제는 송강이 총명하게 생겼음을 알고 자기 문하에 두고 글을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1545년(인종 1년) 서산유씨 유사(柳泗)의 딸과 결혼했다.

6세가 되던 1531년(중종 26년) 아버지를 여의고 평생 어머니를 모시며 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성모산성(聖母山城)에 피신하였으나 적병을 만나자,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함께 살해됐다. 뒤에 그 산을 모호산(母護山)이라 했다.

장인인 유사와 하서 김인후(金麟厚)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32세 때(명종 12년)는 당시 담양 부사로 있던 석천 임억령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나이를 따지지 않고 벗으로 지냈다.

그는 33세에는 사마시에 급제했다. 성산의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더욱 자연과 서적에 몰두했으며, 여러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김인후와 임억령을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백광훈, 송익필 등과 도의로 사귐을 두터이 했는데, 특히 임억령, 고경명, 정철과는 성산의 사선(四仙) 으로 불렀다 한다.

1581년(선조 14년)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을 역임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 및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면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巫誥)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으로 돌아섰다.

뒤이은 선조 30년 정유왜란 때 어머니와 함께 무등산을 거쳐 화순 동복의 모후산 성모산성(聖母山城)에 피신했다. 적병을 만나자, 몸으로 노령의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함께 살해됐다. 뒤에 그 산을 모호산(母護山)이라 불리게 됐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식영정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이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됐다. 성산의 사선(四仙)들은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는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25살이 되던 해에 외당숙이던 김성원이 서하당과 식영정을 지었을 때 사계절에 따른 그 곳의 풍물과 김성원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담은 가사라고 알려지고 있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정철이 김성원에게 시로 그가 입신을 못함에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이 때부터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한 여러 문인들의 시작(詩作) 활동이 이어지게 되며, 김성원도 식영정이십영을 지어내 이곳의 문학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성리서, 주역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나 시로서도 이름이 높아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은 세상에 유행했다. 저서로 '서하당유고'를 남겼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겼다.

 

서하로에도 김성원은 없다.

서하로 역시 역사인물의 호를 빌려 왔을뿐 도로명과 서하 김성원과의 관련성은 없다. 특히나 서하로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도로명을 명명할 때 굳이 인물과의 연관성을 배제하더라도 중요한 건물이나 익히 알고 있는 랜드마크를 활용한 도로명을 지었으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이왕 이름을 명명했다면 후속조치로 왜 그러한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인지 설명이라도 있어야 할 터이다.

우리는 서하로를 거닐면서 서하 김성원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송강 정철만 알던 가사문화의 절정기 성산4선(고경명, 김성원, 임억령, 정철)을 알게 됐다. 그리고 서하 김성원이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을 지어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에게 주었으며 김성원은 송강 정철과 함께 사촌 김윤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했다. 성산4선은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해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었으며 송강 정철은 식영정에서 성산의 아름다움과 김성원을 흠모하며 성산별곡을 남겼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서하로와 함께 기리 남겨지길 바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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