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2)-회산길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2)-회산길
  • 박창배 수습기자
  • 승인 2016.05.2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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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충의신 회재 박광옥 선생의 출생지 회산부락에서 유래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 ‘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예전에는 오솔길이었던 시골의 한적한 길이 시멘트를 발라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진 길을 신작로라고 했다. 걸을 때 먼지도 안나고 비가 와도 진흙에 발이 빠지지도 않은 길이 얼마나 좋았으련만 현대인들은 또다시 오솔길을 찾아 나선다.

제주도의 올레길이나 지리산의 둘레길은 이미 오솔길에서 걷는 길로 유명해졌고, 각 지역마다 한적한 시골길에 이름을 붙여 걷는 여행을 상품화했다. 그만큼 길이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광주도 외곽의 산과 들을 한바퀴 도는 둘레길을 조성 ‘빛고을 산들길’이라 명칭하고, 총 6구간으로 나누었다. 그 중의 4구간은 풍암호수에서 시작하여 전평호를 지나 평동저수지까지 가는 17.9Km를 걷는 구간이다.

여기에 회산길이 있다. 서부농수산물 도매시장 등이 있는 유통단지 입구를 지나 전평호수 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바로 보이는 길이 회산길이다.

   
▲ 회산길은 총연장307m의 짧은 길이지만 아을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게 놓인 길이 아니라 왼쪽으로 굽어져 있다. 마을 뒤로 보이는 산이 개금산이다.

배산임수, 전형적인 시골길

회산길은 총연장 307m의 짧은 길이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물심양면으로 권율 장군과 고경명, 김천일 의병장등을 도운 충의신 회재 박광옥 선생이 출생한 회산마을에서 따온 길 이름이다.  초입에 들어서면 회재 박광옥선생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그리고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진 길 따라 논이 보인다. 그리고 초입에서 곧바로 마을까지 길이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아서 마을로 갈 수 있도록 길이 나있다.

전형적인 한국 시골길이다. 바로 보이는 산이 개금산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전평제(호수)가 보인다. 회산마을은 개금산이 등뒤에서 품고 앞에는 전평호수가 있어 배산임수 지역임을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1568년 회재 박광옥 선생은 주민들의 물걱정 없이 농사를 편하게 지을 수 있도록 개산방죽(전평제)을 쌓았다. 방죽 위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이 정자에서 고봉 기대승과 같이 성리학을 연구했다고도 전해진다. 무너져 가던 방죽을 2013년 5월 광주시 서구청에서 완전 복원하여 산뜻하게 단장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말라”

회산길을 걸으면서 문득 생각이 난 속담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말라” 다니는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옳은 길에서 벗어나는 길이면 가지말아야 하듯이 돼먹지 못한 말은 듣지 말아라 즉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시비조차 가리지 말라는 뜻이다. 요즘은 옳은 길이 아니어도 가는 사람이 많고 옳은 말이 아니어도 듣는 사람이 많다.

길과 관련된 속담이나 격언들을 살펴보면 길은 항상 옳고 바른 것을 뜻한다. 한번 만들어 버린 길은 다시 만들기 힘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 회산길에는 정정임 화백의 스튜디오가 있다. 이 곳에서 6월 중순께 오픈 스튜디오 '달빛사랑전'을 개최할 계획이다.

정정임 화백 스튜디오도 공개 예정

도심속의 시골길인 회산길을 걷다가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넓은 공터가 보인다. 그곳에는 서양화가 정정임 화백의 작업실이 있다. “6년전 풍암동에 있던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도심속 전원이 있는 이 곳으로 옮겨왔다”는 정화백은 “뒷산도 있고 앞에 전평제호수가 있어 산책할 수도 있어 작품활동 하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바로 들었다”고 한다.

풍경도 좋고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해서인지 그는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현재 독일 뮌스터에 있는 화랑에서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지역을 대표할 만한 정 화백은 화려한 수상경력을 차치하더라도 개인전 및 해외교류전을 통해 한국미술을 알리는 등 한국미술계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독일 전시만해서 미안한지 정 화백은 6월 중순부터 한달정도 회산길에 있는 작업실을 개방하여 마당에서는 다른 작가의 조각작품을 전시하고 실내에서는 스튜디오를 개방하여 30여 작품을 전시하는 오픈 스튜디오 ‘달빛사랑전’을 준비 중에 있다. ‘순환’을 주제로 자연의 순환현상을 생명의 역동적 이미지로 형상화 시키는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60여년을 살아온 토박이 박종빈(68) 씨는 “예전에 회재로가 생기기 전에는 걸어서 효천, 양동까지 다녔다”면서 “예전부터 개금산 자락을 따라 자연부락인 개산, 회산, 동산, 화개마을이 있었다”고 마을의 유래를 이야기 해 주었다.

개산마을은 마을 근처에 있는 개금산이란 높은 산이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큰마을이라고 불렸으며 마을앞 구릉지대에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4기가 서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다.

동산마을은 개금산을 등지고 그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600년전 전주이씨 이병석 공이 이곳을 지나다가 산수가 좋아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화개마을은 개금산 동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마을에 자생적으로 살구꽃이 만개했을 때 아름다운 곳이라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회산마을은 임진왜란때의 회재 박광옥선생의 출생지라 하여 그 호를 따서 지어낸 이름으로 500년전 보성군수를 지낸 음성박씨 박노공이 대촌면에서 옮겨와 터를 잡았다.

지금은 총 11호 중 음성박씨 4호, 충주박씨 4호, 나주나씨 3호가 산다.

▲ 마을 초입에 있는 '임란공신회재박광옥선생비시'에 회산마을의 유래가 적혀 있다.
회산길과 관련된 더 자세한 사항은 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는 '임란공신회재 박광옥 선생비'에 적힌 글을 참조하도록 하겠다.

회산길은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조선조 명종(明宗), 선조(宣祖)때의 공신(功臣), 호(號)는 회재(懷齋), 사예(司藝) 벼슬을 지낸 박곤(朴鯤) 선생의 아들로 1526년 서창면(西倉面) 매월동(梅 月洞) 회산마을에서 출생한 회재 박광옥(朴光玉)선생에서 따왔다.

10세때부터 유헌(遊軒) 정황(丁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21세때 초시에 들어 생원진사(生員進士)가 되어 내직을 지내다 운봉현감(雲峰縣監)으로 재직 중 49세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전라도사, 충청도사, 영광군수, 나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싸우고 있을 때 수천의 의병과 수백 석의 군량미를 보내어 대승(大勝)케 하였고 호남과 호서지방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고경명과 김천일의 의병에 자제들을 가담시키고 군량을 많이 보내니, 선조왕(宣祖王)은 그에게 “호남의 충의신(忠義臣)”이라 극찬했다.

그는 문학에도 재질이 뛰어나 대통풍토(大洞風토土)에 이르기를 “호남 즉 박회재(朴懷齋), 기고봉(寄高峰), 박눌재(朴訥齋), 박사암(朴思菴), 이도학(李道學), 이어세(李於世)”라 하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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