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탄허 큰스님을 그리며
다시 탄허 큰스님을 그리며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12.0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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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된 일이다. 직장 생활을 하던 초년 시절에 어떤 잡지의 부록으로 나온 책을 읽게 되었다. 기독교, 가톨릭교, 유교, 불교계의 이름난 종교인들이 여러 조를 이루어 각기 한 가지씩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내용이었다.

거기서 탄허 스님의 말씀에 마음이 동했다. “열반이란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라고 설파했다.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라는 말인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대중들을 위한 물리책을 읽던 중에 그 자리가 우주가 생기기 전 시간과 공간이 없었던 무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천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적 호기심이 강한 성격인지라 기어코 탄허 큰스님을 뵈러 갔다. 서울 혜화동 어디에 있는 개운사라는 절이었다. 그때가 눈이 내린 겨울이었는데 스님은 대뜸 “지금이 겨울이오? 봄이오?”하고 비수를 들이댔다. 나는 “스님, 절 마당에 흰 눈이 내렸습니다.” 했더니 “지금 보리밭에 가서 눈을 헤치고 보리뿌리를 파보라.”고 하셨다. 지금이 봄이라는 것이다.

주역에 밝으신 스님의 설명은 이랬다.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는 하지부터 동지까지가 겨울이고, 땅의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는 동지부터 하지까지가 여름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니까 동지가 지난 지금은 여름이 시작되려는 봄이라는 것이다. 과연 ‘겨울이 오면 봄도 멀리 않으리‘라고 노래한 영국의 시인 P.B.셸리가 떠오르는 시적인 말씀이었다.

그 후로 짬이 나면 자주 탄허 스님을 뵈러갔다. 갈 때마다 한 말씀을 얻어듣고 큰 위안과 감동을 안고 왔다. 스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종교와 철학의 깊은 경지를 펼쳐보여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듯했다. 하늘과 땅, 인간의 이치를 두루 꿰고 계신 그 초월의 경지에 감복한 나머지 조심스럽게 한 말씀을 드렸다. “큰스님, 스님 말씀을 책으로 펴내시면 어떻겠습니까?” 큰스님의 한 소식을 대중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은 벌컥 화를 내셨다. “내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불살라 버리려고 하는데 책은 무슨 놈의 책인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책을 다 없애버리고 싶다니, 대체 무슨 말씀이 저런가. 책과 원수라도 졌단 말인가.

한 달,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때 일을 다 잊어버린 척하고 다시 방문했다. 큰스님도 그때 일을 괘념치 않았다. 산문에 든 분이 그깐 세속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시겠는가. 내가 무릎 꿇고 듣는 ‘탄허 교실’의 강의는 간단없이 계속되었다. 점점 탄허 스님의 강론에 빠져들었다.

한문 문장은 잊어버렸지만 ‘봄을 찾으러 멀리 갔는데 봄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왔더니 마당의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 있더라’ 같은 내용의 액자용 붓글씨를 써서 기다리는 사람들에 낙관을 찍어 선물로 주시곤 했다.

큰스님의 ‘강의’는 사실을 고백하자면 너무 어려웠다. 동양고전에서부터 불경, 스님의 깨달음을 종횡무진으로 펼치시는데 들을수록 도무지 어림할 수가 없었다. 하기는 큰스님의 제자 스님들도 쩔쩔 매는데 내가 그 깊은 뜻을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었으랴.

더듬거리며 자꾸 무슨 뜻인지를 되물으면 큰스님은 혀를 끌끌 차시며 “아이구, 어지간히 됐구먼.”하고 아둔한 생도를 질책했다. 그러시면서 “이봐요. 책 좀 읽어요. 책을.”하고 나무라셨다. 마치 죽비를 맞은 듯했다.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이 때다 싶어 “큰스님, 스님께서 전에 세상의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전에 스님이 했던 말씀이 떠올라 응수했다. “뭐라고? 책을 읽어봐야 왜 책을 불살라 버릴지를 알 거 아니오?”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다음 며칠 몇 시에 찾아뵐까요, 하고 물었더니 큰스님은 “내가 시간에 속박당하지 않으려고 산문에 들었는데. 찾아와서 내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못 만나는 것 아니오?” 그렇게 바람처럼 자유자재하시며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어느 때는 뵈러 갔다가 막 출타 중이어서 엉겹결에 함께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동행하며 말씀을 듣고는 역에 내려서 바로 다른 기차를 타고 되돌아올 적도 있었다.

턴허 큰스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시(詩)요, 경(經)이요, 진리였다. 어떤 책에서도 그처럼 깊은 감동과 감명을 받지 못했다. 스님이야말로 시공이 끊어진 자리에 정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스님은 병을 얻어 예순여섯에 입적을 하게 되는데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총총하셨다.

큰스님 둘레에 제자 스님들이 둘러싸고 앉아서 열반을 기다리던 중 한 스님이 큰스님에게 물었다. “큰스님, 지금 마음이 어떠십니까?” 큰스님의 대답은 이랬다. “여여(如如)하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마음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큰스님은 이 사바세계의 고통 가운데 허덕이는 중생을 구해주고 싶어서 늘 측은한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셨다. 어떻게 죽음의 순간에 ‘여여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봄이 여기 있는 줄 모르고 멀리 찾으러 나서는 내 삶은 춥다. 세상이 어지러운 시대, 탄허 큰스님의 한 말씀이 다시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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