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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6)신간회운동의 성공과 실패
이홍길 고문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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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3  11: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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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3.1 민족해방운동 이후 일제는 이광수 등의 민족개량주의를 유포하여 자치운동을 추동하여 운동의 분열을 조장하고, 민족해방운동도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노선의 혼란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운동의 방향을 수습하고 정립할 필요를 절감한 인사들이 1925년 9월 15일 명월관에 모여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세칭 반좌성명을 발표하였다.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주장하여 외국의 제도, 문물, 학설 같은 것을 그대로 따다가 조선에 통용, 실시하려는 과격론자들이 있으나’라고 말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의 극단적 과격성을 경계하는 것이지 공산주의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가부를 잘 연구하고 장점을 취하여 민족정신의 보존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 통상의 반공성명과는 달랐다.

훗날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와 이론가로 활동한 김준연과 한위건이 참여하였고,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백남운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인 주도세력이 없어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26년 들어 자치운동이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자 ,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절대독립을 주장하는 모든 정치세력들에게는 지체할 수 없는 중요하고도 긴급한 문제로 좌우정파를 아우르는 민족협동전선론이 제기되었다.

1926년 3월 10일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강달영이 주선한 자리에서 안재홍 등 7인이 민족협동전선 문제를 토의하고 강달영은 상호협동을 제안, 원칙적인 찬성을 얻었다. 코민테른은 제1차 국공합작으로 고무되어 있어 조선공산당도 그 영향 하에 있었다. 안재홍에게 있어서 민족협동전선은 일본제국주의와 그에 타협한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공동전선을 의미했다. 사회주의운동을 현실로 인정하여 민족운동과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회주의운동을 민족운동의 우군으로 삼아 타협주의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1925년 말 총독부는 참정권 부여를 넘어 조선에서 자치제 실시를 검토하였다. 이에 고무된 자치론자들은 제2차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말 안재홍은 당시의 운동노선을 타협운동, 비타협운동, 사회주의운동의 세 갈래로 나누고 크게 타협과 비타협으로 양분하였다.

자치운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이 신간회라는 이름 아래 발기인 34명으로 1927년 2월에 출범하였다. 그 구체적 단초를 살피면, 1926년 말 홍명희가 겨울방학을 맞아 경성에 올라와 최남선을 만났는데, 자치운동이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알고 다음날 안재홍을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조선일보의 신석우를 불러 협의한 결과, 순수한 민족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권동진, 박대홍, 박동완, 한용운, 최익환 등의 찬동을 얻고, 북경에 있는 신채호에게도 연락하여 발기인에 참여시켰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는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여 3개 항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1)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2)단결을 공고히 하며 3)일체의 기회주의를 부인한다고 하였는데, 일제의 허가를 받기전의 초안은 1)조선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궁극적 해결을 도모하고 2)민족적 단결을 도모하며 3)타협주의를 부인한다고 하여 자치운동을 배격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2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하고 1천여 명의 방청객이 운집하였다.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정치문화 신석우, 조사연구 안재홍, 조직 홍명희 등이었다. 신간회가 발기, 창립하는 데에는 조선일보 계열이 앞장서 4명이 총무간사였고, 조선일보는 신간회 기관지 역할을 자임하였다.

창립 1주년인 1928년 2월, 신간회는 지회 123개, 회원 2만에 이르는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신간회의 각 지회에서는 연설회 등 계몽운동을 펼치고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에 개입하기도 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당국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신간회 본부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원산총파업을 찬조하고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반일시위로 확대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추진한 일이었다. 민중대회 연사로는 권동진, 허헌, 홍명희, 한용운 등 11명을 선정하고 격문 2만매를 인쇄하였지만 당국에 90여 명에 달하는 인사가 검거되어 민중대회는 좌절되고 말았다. 민중대회로 타격을 입은 신간회는 김병로를 새 집행부로 하는 변신으로 온건노선을 취함으로써 알력이 표면화되어 우여곡절 끝에 1931년 해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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