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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기행(2) 안산에서 부안 우반동까지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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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31  09: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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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빛이 뜰 안에 가득하면 괜히 가슴이 설레고 아득히 먼 추억 속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면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음에 둔 친구와 동행하여 문학이나 역사기행에 참여해도 좋겠고, 아니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바닷가나 깊은 산 오솔길을 발이 닳도록 걸으면서 생활에 찌든 머릿속 잡념들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리면 어떨까. 독자들의 가을 여행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실린 ‘실학기행’을 싣는다.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폐부를 찌를 것이다. 다산, 성호, 반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민족 역사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편집자 주>

화성을 돌아보고 나서 예정시간보다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연포갈비'가 유명하다더니 정말 맛이 좋았다. 차를 마시면서 이달호 박사의 저서인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 건설』을 소개받고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약 40여 분이나 달렸을까. 안산에 도착해 성호 이익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기념관으로 직행하여 전시물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서 메모도 하고 안내자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이곳은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전시관, 1930년대 이후 출간된 성호학 연구논문 등을 전시한 기획전시관, 선생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구성해 상영하는 영상관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 성호박물관(사진출처=상록구청)

영정으로 본 선생의 모습은 단아했으며 눈빛이 형연(炯然)하다. 다산은 성호와 같이 근기(近幾)지방에서 나고 자라면서 성호의 문제자질(門弟子姪)들과 교우하였으며, 성호의 저서를 읽으면서 그를 흠앙, 사숙하여 성호학의 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성호학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한계를 극복하여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흔히 다산을 '성호좌파'라고도 하는데 성호에 기본 입장을 두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용후생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와도 교류한다. 그들의 장점을 이해하고 생산기술혁신과 농구, 직기(織機) 병기 등 광범한 기술 개발을 강조하였다.

박제가의 북학(北學)에는 북벌(北伐)론에 반하는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박제가의 저술인 『북학의(北學議)』란 맹자에 소위 '북학어중국(北學於中國)'에서 이름 지은 것으로 영조 41년(1767년)에 입연(入燕)한 홍대용과 정조 2년(1778년)에 입연한 박제가, 이덕무, 정조 4년에 연경에 들어간 박지원 등이 지나(支那)의 경제 발전을 목도하고 조선인의 구차스럽고 고식적인 생활상을 깊이 반성하고 진보한 생산기술과 교역의 확대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사회 개량추의(改良芻議)의 초석을 깐 이론이다. 다산이 서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크리스트교가 아닌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이었다.

성호 이익은 1681년(숙종 7)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아버지 이하진(李夏鎭)과 권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주이씨 집안으로 8대조 이후 판서, 좌찬성, 지평 등을 지낸 선조들이 있었고 아버지가 대사간을 지냈으나 그가 태어날 때에는 경신환국(1680년)때 희생이 되어 평안도 운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 25세 때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다음 해 둘째 형 이잠(李潛)이 숙종에게 상소하여 장희빈을 옹호하다가 처형되면서 큰 충격에 빠져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瞻星)촌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퇴계의 학설을 좋아하면서도 사변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율곡의 학설에도 관심을 보였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단순히 익히고 깨치는 것에 치중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사구시적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반계의 정치, 경제, 사회 개혁 등을 계승하여 전제의 개혁과 민생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가난하지만 근검절약하면 어찌 어렵게 살 것이냐. 오직 부와 귀는 언제나 부지런히 노력하는 데 있다'라고도 했다. 『곽우록(藿憂錄)』, 『성호사설(星湖僿說)』, 『성호문집(星湖文集)』 등을 남겼는데 '사설'이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세세한 잡저를 분류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는 40여 세부터 평생을 두고 주관적인 생각으로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깨친 바가 있으며 이를 메모하고 또한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꼼꼼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성호의 학문적 입장은 제자인 안정복에 의해 계승되었고 『동사강목』은 그런 맥락에서 쓰여진 책이다. 『성호사설』이 『반계수록』의 사상적인 계승이라고 한다면 두 분의 사상은 다산학의 연원(淵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산에서의 깊은 인상을 뒤로 한 채 전북 부안 반계유적지로 향했다.

부안(扶安) 인근 우반동(愚磻洞)이 우리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6세기 중엽 허진동(許震童)이 이곳에 살면서부터이다. 태인허씨로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지내다가 부친의 죽음에 임하여 우반동으로 물러나 우반정을 짓고 살았는데 그의 모친이 박순(朴淳)의 누이인 연고로 사암 박순이 『우반 10경』을 시(詩)로 읊으면서 우반동의 아름다운 경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랑과 혁명의 땅 우반동'이라고 표현한 분도 있는데 허균(1569~1618)이 1601년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호남에 있는 삼창(三倉)의 조운을 감독하러 오가는 길에 이곳 부안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간 적이 있다. 그 후 공주목사(1608년)를 지내다가 파직되었는데 얼마 후 허균은 우반동으로 들어갔다. 우반동은 마치 소쿠리 속 같아서 소나무 숲이 3면을 에워싸고 땅이 기름져 시량(柴糧)을 얻기에 알맞은 곳이다. 허균이 이곳에 정착하기까지는 당시 부안군수로 있던 심광세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은 우반동에서 좋은 친구들과 만나고 때로는 이매창(李梅窓)과 사귀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영창대군을 세워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는 역모혐의로 제 명을 다할 수 없었다.

허균에 이은 우반동 명인은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다. 유형원이 33세(효종 4년, 1653년)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 들어가 5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현종 14년, 1673년) 20여 년 동안 우반동은 그의 사상의 거처였다. 반계는 바닷가 송림이 우거진 산중턱에 초가삼간을 지어 은둔처로 삼고 저술을 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반계가 경기도 과천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된 연유는 그의 7대조 유관(柳寬)이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 받은 사패지가 이 일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柳成民)은 이곳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경작은 하지 않고 있다가 허균이 우반동에 살던 1612년 가을 한양에서 내려와 논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 반계서당 입구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일행은 안산에서 출발한 지 3시간여 만에 우반동 입구에 당도하여 걸어서 10여 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나지막한 남향받이 산언덕 옛터에 복원해 놓은 한옥 4칸과 반계선생이 마셨던 샘이 초라하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행은 기념촬영부터 하고 나서 선생이 툇마루에 앉아 쉬면서 서해와 염전을 일구던 어부들과 가난한 농부들의 삶을 지켜보았을, 그 옛날을 회상하였다. 경세제민의 철학을 목표로 유토피아를 꿈꾸었을 것이다.

한더위여서 석양볕이 정오와 마찬가지였지만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우반동 마을까지는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웠다. 성호 선생이 지은 전(傳)에 따르면 '유형원은 우반동에 몇 칸 집을 짓고 서재에는 장서 만 권을 갖추었다. 그리고 침식을 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기록대로라면 우반동 어딘가에 반계의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계는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비교적 유족한 환경에서 자라 4세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스승은 외숙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이었다. 이원진은 이익의 당숙으로서 벼슬은 감사에 이르렀다. 6세에 서경, 8세에 역경, 9세에 제자백가의 책을 섭렵할 정도로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18세 되던 해에 철산부사를 지낸 풍산(豊山) 심씨의 딸과 결혼했다. 21세 때 지금의 양평(楊平) 땅인 지평(砥平) 화곡리(花谷里)라는 곳으로 이사했고 이듬해 다시 여주 백양동(白羊洞)으로 옮겼는데 이 남한강변은 성호, 다산 등 실학파의 오랜 연고지였던 것이다.

반계의 학문은 대단히 광범위하다. 정치, 경제, 역사, 지리, 군사, 언어, 문학 등인데 저서 가운데 『동국사강목조례』, 『동국문초』, 『기행목록』 등은 서목(書目)만 전해지고 있을 뿐 전부 민멸(泯滅)되고 『반계수록』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수록'은 우리나라 실학사상, 특히 경국제민사상을 담은 저서이다. 선생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경계(境界)가 똑바르면 만사가 다 된다. 전제(田制)가 바르지 못하면 따라서 민산(民産)이 떳떳하지 못할 것이요,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할 것이요, 호구(戶口)가 밝혀지지 않을 것이요, 군오(軍伍)가 정비되지 않을 것이요, 송사(訟事)가 끊이지 않을 것이요, 형벌이 간소하게 되지 못할 것이요, 이와 같이 되고도 정치를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토지는 천하의 대본(大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계수록의 내용은 토지 제도에서부터 관제, 국방, 교육, 통신, 교통 등 국가체제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에 관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한 글에 "부자의 땅은 끝없이 경계가 잇닿을 형편이고 빈자는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땅도 없게 되어, 부익부 빈익빈으로 급기야는 모리하는 무리들이 이 토지를 모조리 갖게 되는 한편 양민(良民)은 유리걸식하다가 머슴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처방이 균전제였다. 농민 1인에게 40마지기를 배분하자는 것인데, 그는 이를 국가에 공납을 내고 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지로 본 것이다.

이익은 그의 「사설」에서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국가나 사회의 현실 문제를 아는 이라면 이율곡과 유반계가 있을 뿐이라고 했고, 홍대용은 우리나라 사람 저서 가운데서 율곡의 『성학집요(聖學輯要)』와 반계의 『수록』이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이라고 했다. 사실 반계는 사상적으로 율곡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율곡이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에서 표현했듯이 "조선 건국 이후 경세가로 조준, 정도전, 세종 때 양성지, 정인지, 서거정, 중종 때 조광조가 있었으나 무고(誣告)로 죽임을 당한 뒤 감히 국사(國事)를 말하는 이가 없어졌다"라고 했는데 이들의 뒤를 이은 율곡(栗谷)을 경세학(經世學)의 거장으로 본 것이다. 율곡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반계는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헤쳤고, 조정의 무능과 부패를 공격하고 제도의 결함을 고치려고 했던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구하려면 무엇보다도 살림이 넉넉해져야한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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