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1) 남양주 능내에서 수원 화성까지
실학기행(1) 남양주 능내에서 수원 화성까지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7.10.2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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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빛이 뜰 안에 가득하면 괜히 가슴이 설레고 아득히 먼 추억 속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면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음에 둔 친구와 동행하여 문학이나 역사기행에 참여해도 좋겠고, 아니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바닷가나 깊은 산 오솔길을 발이 닳도록 걸으면서 생활에 찌든 머릿속 잡념들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리면 어떨까. 독자들의 가을 여행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 오래 전의 글이지만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실린 ‘실학기행(實學紀行)’을 싣는다.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폐부를 찌를 것이다. 다산, 성호, 반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민족 역사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편집자 주>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조선후기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일구어낸 산실, 󰡐실학의 고장󰡑을 전문가들과 함께 순례한다는 것은 대단히 뜻 깊은 일이다. 아마도 인생에서 한 번도 그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채 세상을 마감한 분들도 허다할 터. 학문이나 사상이 그 시대적 환경이나 당대의 삶의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듯이 이번 여행에서 다산, 성호, 반계, 손암의 족적을 따라가면서 변화와 전환의 시대에 지식인은 󰡐무슨 고민을 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되는가󰡑라고 자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부귀공명 같은 건 아예 단념하거나 유배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시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보다 철저하게 살다간 분들이다. 그래서 모진 운명에도 불구하고 역사 앞에서 떳떳하게 살고자 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세상 밖으로 쫓겨난 덕분인지 가파른 삶일망정 민중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깊은 산골에 은거하면서 보다 전진적인 방향으로의 진전을 모색한 끝에 불후의 명저를 남겼다.

정인보 선생은 『담원국학산고』에서 󰡒조선근고의 학술사를 종계(綜系)하여 보면 반계가 1조(一祖)요, 성호가 그 2조(二祖)요, 다산이 3조(三祖)󰡓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역사공부는 고대에서 현대로 학습하기 마련인데 이번 기행은 다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성호, 반계로 거슬러 오르다가 다시 해남 대둔산 자락에 있는 다산의 외가이며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에서 끝난다.

우리 일행(43명)은 오전 9시 정각에 동서울터미널을 벗어나 남양주 다산 생가로 향했다. 다산의 고향 소내로 가는 차안에서 강진과 소내를 번갈아 머릿속에 떠올린다. 한반도 남쪽 끝 외진 바닷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즈음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기를 󰡒지금 이 만민이 구렁텅이로 빠지는 판에 장차 어찌할 것이요󰡓라고 했다. 다산의 현실 인식에 대한 단면을 보여준 글이다. 정조가 재위 24년 49세로 갑자기 승하하자 어린 나이로 등극한 순조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는데 정조 시대에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들이 국정을 전횡하면서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바람에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다산은 국정 전반이 성한 곳 하나 없이 구석구석 병들었다고 진단하고 󰡒지금 즉시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다산은 이러한 관점에서 경국제민의 철학을 녹여 『탕론蕩論』, 『원목原牧』, 『전론田論』,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을 비롯한 오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에 담았다.

우리는 40여 분 만에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도착하였다. 벌써 여러 차례 다녀갔음에도 소내의 공기는 늘 신선하고 맑다. 좋은 땅이라서 그런지 그윽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능내리는 소내(苕川)라고도 부르는데, 그 유래는 다산(茶山) 스스로 『임청정기臨淸亭記』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몇 백 년 전에는 소양강이 고랑(皐狼) 아래에 이르러 동쪽으로 남주(藍州)의 북쪽을 지나 남강(南江)으로 흘러갔다. 그러므로 남강은 물살이 빠르고 거세게 곧장 서쪽으로 달려 반고(盤皐)의 아래에서 합쳐졌다. 그리하여 홍수가 질 때마다 반고는 물에 잠기므로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그 뒤에는 소양강이 아래로 부암(鳧巖)의 남쪽에 이르러 비로소 남강과 만나 남강의 거센 물살을 밀어내어 물리쳤다. 물은 귀음(龜陰)의 강기슭을 지나 석호(石湖)의 동쪽에 이르러 비로소 꺾어져 서쪽으로 향하게 되므로 이때는 반고가 우뚝 높은 위치에 있게 되어 촌락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초천(苕川)이 생기게 된 역사이다. 그렇지만 새로 생겨난 땅이라 주인이 없었다. 이를 발견한 사람은 다산의 선조 정시윤(丁時潤)이었다. 정시윤은 병조참의를 지냈는데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시골로 방축되었다. 한강의 물가를 따라 올라가면서 노년에 살 곳을 구하다가 소내 위쪽에 이르러 반고를 발견하였다. 반고를 셋으로 나누어 그 중 서쪽 ⅔쯤 되는 곳에 정자를 짓고 임청정(臨淸亭)이라 하였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 󰡒동고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물에 임하여 시를 짓는다.(登東皐以舒嘯臨淸流而賦詩)󰡓라는 구절의 뜻을 취한 것이다.

정시윤은 세 아들에게 이 땅을 나누어 주었다. 동쪽에는 큰아들, 서쪽에는 둘째가 살았다. 막내는 임청정을 받았다. 또 유산(酉山) 아래 조그마하게 지은 집은 측실에게서 얻은 자제가 차지하였다.

정약용은 정시윤의 장남 정도태(丁道泰)의 후손이지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임청정 일대의 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다산 선생이 사시던 여유당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집이지만 당시에는 그윽한 강마을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여유당 앞에 서니 다산의 고단했던 삶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영조 38년(1762)에 태어나 헌종 2년(1836)에 세상을 떴다. 39세까지 군왕의 지우(知遇)를 입어 빛나는 활동을 하다가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한 후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주로 유배지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해배 뒤 18년 동안 남긴 학문적 성과 또한 크다. 북한강에 배를 띄우고 협곡을 거슬러 춘천을 오가면서 다산은 여생을 일민(逸民)으로 지내겠다고 다짐했지만 춘천이 위정자의 잘못으로 극심하게 피폐되어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는 통탄해 마지않았다.

▲ 다산 정약용의 묘(사진출처=실학박물관)

일행은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의 안내로 먼저 다산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실학기행을 고했다. 여유당 주변에 있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과 2009년에 문을 연 실학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관장 김시업 선생이 동행하였기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전 관장 안병직 교수가 경내를 돌아보면서 실학박물관에 관해서 자세한 설명을 보태 주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는 양명학(陽明學)에 반동(反動)으로써 청나라의 고증학파가 내세운 슬로건이며 문헌학적인 학문의 태도를 말한다. 다산은 성리학으로 찌든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하나로 아울러 실학을 집대성 하였다. 변혁의 중요한 동력을 사상에서 찾고자 했을 것이다.

󰡐18세기에 발생한 혁명의 창시자󰡑라는 평을 듣고 있는 볼테르의 관 위에 프랑스가 바친 헌사는 “그는 시인(詩人)이자 역사학자였으며 철학가였다. 그는 인류정신을 개척했고 인간의 정신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다”였다. 경기도가 다산의 유적지를 아름답게 가꾸고 보존해 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한순간 시원한 바람이 짙게 우거진 숲을 흔들면서 나그네의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주었다.

우리 일행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수원 화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지러이 널려 있는 대도시 인근의 풍경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차창 밖으로 스쳐갔다. 한강은 민중의 옷자락에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수도 서울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궁정동에서 사살된 대통령의 검붉은 시신을 건너 주기도 하였다.

강은 역사와 함께 사람의 생각도 실어 나르는가 보다. 나는 가끔씩 원시에로의 회귀를 꿈꾼다. 원시림 속에서 산짐승들이 뛰어 놀고 사냥꾼들은 야수와 조우하면서 험한 계곡을 누비는 그런 풍경이 그림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화성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차를 타고 지나면서 여러 차례 보기는 했으나 성을 밟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교단에 서서 글로 읽고 사진으로 본 것만도 40여 년의 세월이 쌓였으니 겉모습이야 조금도 낯설지가 않았다. 화성과 동시대에 건설된 프랑스 파리나 고대 로마, 유럽에 널려 있는 성들을 구경하면서 그 규모의 거대함에 놀라곤 했는데, 우리의 화성을 보는 순간 󰡐참 아름답구나. 예술품 가운데서도 걸작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의 풍수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복판에 아름답게 핀 한 송이 꽃봉오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수려한 강산 그대로다. 이달호 수원 박물관장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여 안내하였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은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과, 1786년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와 의빈성씨의 죽음이 원인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사도세자의 묏자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이에 조정에서는 구산(求山)을 논의한 끝에 옛 수원부의 읍치로 이장키로 한 것이다. 화성 남쪽에 있는 화산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한 송이 꽃이 연상될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그래서 이름도 화산(花山)으로 붙인 것일까.

사도세자의 원침이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진 것은 1789년이다. 그리고 화산에 있던 수원 읍치는 팔달산을 배후에 두고 신도시를 건설하여 옮겼다. 나아가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신도시에 행궁을 둘러싸는 성을 쌓고 도시기반시설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화성 건설의 최종목표는 1790년 순조의 탄생을 기점으로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정조는 상왕으로 머물면서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도하는 왕권강화의 기지로 삼고자 하는 데 있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이 지침서가 되었다. 다산이 참고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은 서양인 선교사 요아네스 테렌츠(Joannes Terrenz.1576~1630)가 서양의 기술서적을 편집하여 저술한 것을 중국인 제자 왕징(王徵, 1571~1644)이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이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1791년 정조의 명에 따라 수입하여 다산이 이를 깊게 연구 적용하였다. 공사발주자 정조, 시공총책임자 영중추부사 채제공, 현장총책 부사직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 1796년 9월에 완공을 보았다. 33개월 만에 신도시 건설이 이루어진 것이다. 석수, 목수, 미장이 등의 기술자 총 11,820명, 돌덩이 187,600개, 벽돌 695,000개, 목재 26,200주, 철물 559,000근 등과 총공사비 973,520냥, 양곡 1,500석이 지출된 대역사였다.

이달호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농촌으로부터 이탈한 떠돌이농사꾼들이 품팔이로 고용된 것과 당시 무르익었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공기를 단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공기의 단축은 비용의 절감은 물론 민폐를 줄이는 데 있어서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성 건설은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시장 팽창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싹트고 있던 상품화폐경제의 결정체라고 했다. 특히, 정조와 정약용의 부역이 아닌 󰡐임금노동󰡑은 국책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조선 초기의 경제외적 강제의 시대에서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것도 한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는 낙남헌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도 파손되었으나 1970년대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수원 화성 동북공심돈(사진출처=수원관광)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4, 수문2, 공심론3, 장대2, 노대2, 포주루(鋪侏樓)5, 포루(砲樓) 화포를 설치했던 시설5, 각루4, 암문5, 봉돈1, 적대4, 치성9, 은구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1, 공심돈1, 암문1, 적대2, 은구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지금도 도시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화성은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성 축성은 물론 우리 건축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며, 2007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편, 정조 임금은 수원부 읍치(邑治) 조성에 공이 있는 조심태의 집안과 새로 들어선 장헌세자의 원침을 최고의 명당으로 지목한 윤선도의 자손들에게 과거시험에 대한 특혜조치를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남에 살던 그의 후손들이 수원 신 읍치로 집단 이주하도록 배려하였다. 정조 임금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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