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3)
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3)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8.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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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47년 윤9월에 유희춘은 제주도에서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면서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만난다. 하서는 미암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실낱같은 재회를 기약한다.

술에 취해 꺾었다오. 버들가지 하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 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

만 리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을 떠난다지.

저 달이 몇 번이야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 미암박물관 전시물 – 송덕봉의 시, 마천령 위에서

그리고 하서는 ‘자네가 멀리 귀양을 가고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아들을 나의 사위로 삼겠노라’고 말한다. 그 당시 미암의 외아들 유경렴(1539∼1603)은 벼슬이 없었다. 하서 집안에서 반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서는 셋째 딸을 미암의 외아들에게 시집보낸다. 지난 날 성균관 시절에 미암이 간병하여 자기의 목숨을 구한 은혜를 갚으려 했던 것이었을까? 그렇다 할지라도 귀양 간 친구와 사돈 맺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

1548년 2월에 유희춘은 유배지 함경도 종성에 도착하였다. 종성은 함경도 북단으로 두만강에 접한 외진 곳, 옛날에는 여진족의 땅이었다.

미암은 외롭고 절망스러웠다. 특히 칠순의 홀어머니에게는 불효였다. 한번은 다섯 달 동안 소식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불효한 마음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그나마 위로와 격려가 된 것은 하서가 보내준 장편의 시였다.

조용히 앉아 세월 보내려는데 端居歷歲月

어찌 다시 일들은 얽히는가. 奈復物交相

기질은 변화하기 매우 어려워 氣質極難變

구습 따르다 촌티를 못 면했네 因循未免鄕

아름다운 아미암 같은 사람 有美眉巖子

어찌 이리도 생각나게 하는가 胡然使我思

언제 함께 평상에 앉아 何當共一榻

책 펴고 은미한 이치 밝힐 수 있을지 開卷析毫釐

 

미암은 너무 반가워서 시로 화답했다.

종성은 천하의 궁벽한 곳 鐘山天下僻

티끌 모래 날로 일어 자욱만 하네. 沙礫日交相

사투리를 잃지 않은 십년 나그네 十載南音客

부질없이 고향 꿈만 꾸고 있다네. 空勞夢故鄕

북쪽 변방 아무도 물어오는 사람 없는데 塞北無人問

하서 혼자 나를 생각하며 河西獨我思

삼 백 자나 되는 시를 새로 적어 보내 新詩三百字

털끝만큼 어긋나다 크게 그르쳤음을 말해주네. 遙寄話毫釐

한편, 고통의 세월을 이겨 낼 수 있었던 힘은 ‘학문’이었다. 유희춘은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읽고 또 읽으며 교정하고 주해하였고, 「자치통감」도 읽었다.

옛날부터 종성은 풍속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숭상하고 글자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고을 사람들에게 미암은 공부를 가르쳤다.

1612년에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한 김시양이 편찬한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涪溪)는 종성(鐘城)의 다른 이름임)에는 “미암 유희춘은 을사사화 때 종성에서 귀양살이한 것이 19년 동안이나 되었다. 곤궁하게 살아가면서도 만 권이나 되는 서적을 독파하고 『속몽구(續蒙求)』를 저술하여 선비들에게 혜택을 주니, 그에게 찾아가서 배우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북쪽 사람들이 지금까지 유정언(柳正言)이라고 하면서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정언으로 와서 귀양살이했기 때문이리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1558년에 모친 최씨가 별세했다. 미암은 유배지에서 여막을 치고 상을 치렀다. 1560년에는 친구이자 사돈인 하서 김인후마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한 가지 반가운 일은 시어머니 3년 상을 홀로 치른 아내 송덕봉이 종성 유배지를 1560년에 찾아온 것이다. 그 길이 어찌나 멀었던지 덕봉은 시를 남겼다.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적힌 글을 읽어보자.

미암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하였는데, 홀로 만 리 길을 걸어서 종성에 있는 미암에게 가다가 마천령(蘑天嶺)을 지날 때에 시를 지었다.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 行行遂至磨天嶺

동해는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 東海無涯鏡面平

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을 어이 왔던가 萬里婦人何事到

삼종(三從)의 의리는 중하고 이 한 몸은 가벼운 것을 三從義重一身輕

이 시는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었다고 평할 만하다.

1) 이 일화는 허균의 『성소부부고』와 이정형의 『동각잡기』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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