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1)
길 위의 호남 선비,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7.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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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미암일기(보물 제260호)로 널리 알려진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유적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를 간다. 여기에는 미암박물관, 모현관, 연계정, 미암 종가와 사당이 있다.

먼저 미암 박물관부터 찾았다. 박물관 입구에는 ‘미암 유희춘, 경학연구와 주자학 확산에 헌신한 유학자’라고 적힌 유희춘의 연보가 있다. 연보는 ‘1기(期) 1513∼1546, 2기 1547∼1565, 3기 1567∼1576, 4기 1577∼1871’로 나누어져 있는데, 1기는 탄생에서 출사, 2기는 유배생활, 3기는 벼슬살이, 4기는 별세 이후이다.

유희춘은 1513년에 전라도 해남현 해리의 외가에서 유계린과 탐진 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계린은 장인 최부와 순천으로 유배 온 김굉필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선비였으나 최부와 김굉필이 1504년 갑자사화로 희생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평생 처사로 살았다.

어머니 탐진 최씨는 『표해록』의 저자이자 사화로 희생된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1454∼1504)의 장녀이다.

유희춘의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인데, 미암이란 호는 그가 해남 금강산 남쪽 기슭에 살았을 때, 집 뒤의 바위가 미인의 눈썹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때 영남에서 순천으로 이사를 왔으며 부친인 유계린이 최부의 딸과 결혼하면서 처향(妻鄕)인 해남으로 이주했다.

유희춘은 대(代)를 이은 사화(士禍)의 피해자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조부 최부는 연산군의 철퇴에 쓰러졌고, 이조정랑을 한 형 유성춘(1495∼1522)은 1519년 기묘사화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와 바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유성춘은 최산두 · 윤구와 함께 호남 3걸이라 불렸는데 그는 ‘권세가와 토호·부상(富商) 등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한전론(限田論)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매우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유희춘은 9세 때부터 부친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평생 처사(處士)로 지낸 부친은 유희춘에게 수신제가의 길을 가르쳤다.

1528년, 그의 나이 16세에 부친 유계린을 여윈 유희춘은 화순 동복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있는 신재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찾았다. 광양출신 최산두는 순천에서 유배 중인 김굉필 문하에서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였고, 형 유성춘과는 혁신정치의 동료이기도 하였다. 유희춘은 주로 물염정(勿染亭)에서 하서 김인후(1510∼1560)와 함께 최산두에게 공부를 배웠다. 하서의 시가 전해진다. 1)

1536년에 유희춘은 송덕봉(宋德峰 1521∼1578)과 결혼했다. 그녀는 담양 대곡리에 세거한 사헌부 감찰 송준의 딸인데 경서와 역사서를 섭렵하며 시를 지을 줄 아는 여사(女士)였다. 그녀의 이름은 종개, 호가 덕봉이다. 여자가 호를 가졌고, 『덕봉집』이라는 문집이 있을 정도였으니 대단히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고단하고 외로운 청년 유희춘에게 송덕봉은 위안이고 기쁨이었을까? 유희춘은 혼인하자 한양의 중학에 입학하더니만, 1538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그해 10월에 유희춘은 성균관 학유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때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전염병에 걸려 위독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유희춘은 자기 집에 데려다가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서게 하였고, 김인후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허균은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에서 이 일화를 전하고 있다.

▲ 미암박물관 전경

1) 미암박물관에는 ‘유희춘이 1532년에 최산두 문하에서 김인후와 함께 공부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하서 김인후 연보’에는 ‘1527년에 김인후가 최산두를 찾아가 수학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인후가 지은 시에는 “신재 선생께서 ‘술 남았느냐’고 물었던 말을 기억하면서 두보의 시에 화운하여 경범에게 지어 보이다.憶神齋問酒和杜陵韻示景范”는 시가 있다.

신재 선생께서 나복현에 유배 와서는

술 남았느냐고 첩에게 물었다네.

떠다니는 세상이라 유난히 느낀 게 많아

석양에도 취한 술 깨지를 않네.

한편, 최산두는 화순의 기암절벽을 두루 다니면서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 赤壁賦」에 나오는 중국 양자강 남안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赤壁)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제물염정(題勿染亭) 시도 남겼는데 아쉽게도 4구중 2구만 남아 있다.

백로가 고기 엿보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노란 꾀꼬리 나비 쫒는 모습, 산이 황금을 토하는 것 같네

江含白玉窺魚鷺 강함백옥규어로

山吐黃金進蝶鶯 산토황금진접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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