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6)
길 위의 호남 선비,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6)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7.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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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관수정 바로 뒷산에는 송흠의 묘소가 있다. 묘소는 단출하다. 망주가 좌우에 있고, 묘 앞에는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송공지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 무덤 옆에는 거북이 등위에 세워진 묘갈비가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소론의 영수인 명재 윤증(尹拯 1629∼1711)이 지었다. 묘갈명 맨 마지막에는 명문(銘文)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송흠 묘소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 萊子嬰兒之啼

백기 양진은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 伯起暮夜之知

소부는 동문 밖으로 물러나고 / 疏傅東門之退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네. / 潞公洛社之會

세상에 드문 미담인데 / 曠世美事

공이 실로 겸비하였네. / 公實兼備

스스로 성취하는 것은 사람이고 / 自致者人

온전히 내려주는 것은 하늘이네 / 全畀者天

여기 나라의 아름다운 많은 일들을 보게 되었으니

/ 于以見國家之亨嘉

어찌 공 한 몸의 영화에 그치겠는가 / 奚止公一身之英華

아 백년이 지나도록 / 吁嗟百祀

풍모와 운치를 잇지 못하였기에 / 風韻莫嗣

내 공의 무덤에 명을 지어 / 我銘其丘

공의 숨은 덕을 밝히노라 / 用闡厥幽

숭정 기원후 56년 계해 (1683년) 파평 윤증 지음

그러면 명문(銘文)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 萊子嬰兒之啼

노래자(老萊子)는 중국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70세의 나이에도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는 인물이다. 송흠도 99세의 어머니를 위하여 76세의 나이에 전라감사 벼슬을 사직하고 모친이 101세에 별세할 때 까지 극진히 봉양을 하였으니 정말 효심이 지극한 분이다. 그의 시호가 효헌공(孝憲公)이었으니 얼마나 효의 근본이 되는 인물인가!

양백기는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 伯起暮夜之知

양백기(楊伯起)는 후한(後漢) 때의 학자 양진(楊震)을 말하는 데, 그가 동래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茂才)로 천거를 받았던 창읍령(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金) 10근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니,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하고 금을 물리쳤다 한다.

이후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는 것을 4지(四知)”라 하며 공직자의 청렴을 강조하는 실천규범으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었다.

소부는 동문으로 물러 나갔고 / 疏傅東門之退

소부(疏傅)는 중국 한(漢)나라 소광(疏廣)이다. 그는 선제(宣帝)때 황태자의 태부(太傅)로 있었는데,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이미 높아졌는데도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조카 수(受)와 함께 사퇴하고 장안의 동쪽 성문으로 나가 고향에 내려갔다.

이것은 송흠이 1541년에 우참찬으로 중종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으나 사직 허락을 받고 다시 시골로 내려간 것을 한나라 소부에 비유한 것이다. 이 때 송흠은 삼정승 이하 여러 대신들의 특별한 전별을 받았다.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으니 / 潞公洛社之會

노공(潞公)은 송나라 때 장상(將相)을 지낸 문언박(文彦博)의 봉호이다. 사마광, 부필(富弼) 등 13인과 함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는 노인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송흠은 1543년에 특명으로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당시 전라감사 규암 송인수가 기영정(耆英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세상에 드문 미담인데 / 曠世美事

공이 실로 겸비하였네 / 公實兼備

송흠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 일에는 충성하고 청렴하며, 절제하고 겸손하게 살았으니 이 얼마나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가!

끝으로 송흠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지지(知止)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뜻인데 노자의 <도덕경> 제44장에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하였다. 2)

1) 묘갈명의 맨 마지막 부분인 명문(銘文)은 묘갈명의 주인공에 대한 평가와 동시에 찬사이다.

2) 기묘년(1519, 중종14)에 화를 당한 뒤에는 스스로 지지당(知止堂)이라고 호를 지었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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