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7)
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7)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5.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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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절당의 김진옥 · 유근의 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석주 권필의 시판 왼편에는 김진옥(1659∽1736), 오른 편에는 유근(1549∽1627)의 시판이 있다. 

먼저 김진옥의 시를 살펴보자. 김진옥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현손(4대손)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인인데 그의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김익희이다.

▲김진옥 시판

필암서원 경차 송강선생운

학문과 출처를 이야기 하면

나의 조부께서 하서 선생을 말했다오.

지금도 느끼는 한 오이씨의 향기는

오래도록 심중에 남아있지요.

學問與出處    학문여출처

吾祖說河翁    오조설하옹

今來香一瓣    금래향일판

耿耿宿心中    경경숙심중

다음은 유근의 시이다. 

▲유근 시판

하서 선생을 모신 서원에서 쓰다(題河西書院)

제1수

후생은 길을 잃어 길게 슬퍼하오며

평생토록 하서선생 뵙지 못하였네.

참신하고 빼어난 시(詩)는 무적(無敵)이었고

널리 배우고 본성 지켜 학덕이 넉넉하네.

제2수

하늘위에 북두성(北斗星) 헛되이 바라보니

사람들이 어찌 구름에 가릴 뿐이랴?

우뚝한 사당 바라보니 하서 선생 계신 듯하니

어찌하면 선생의 뜻 따라 갈 수 있을 까?

1617년 후학 유근 1)

유근은 호가 서경(西坰)으로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문인이다.

광주 월봉서원 장판각에는 그가 1617년에 지은 고봉선생 소회시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2)

유근은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1587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 해에 일본의 승려 현소가 사신으로 왔는데 문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선위사가 되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저의 문제로 좌의정 정철이 화를 당할 때, 유근은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임금이 의주로 갈 때 호종했고, 1593년에 도승지로 민심을 수습했다. 1601년에는 예조판서가 되었고, 1604년에 호성공신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정을 장악하자 그는 사직하고 괴산에 은거했다. 1613년(광해군 5)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반대하여 시골로 피했다는 죄로 관작이 삭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자,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서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

한편. 청절당 다른 벽에는 추담 김우급(1574∽1643)의 시판이 걸려 있다. 여기에는 시 두 수가 적혀 있다. 하나는 필암서원 경차 서경 유상공운 다른 하나는 제서원중영청이다. 

▲김우급 시판

여기서는 유근의 시에 차운한 ‘필암서원 경차 서경유상공운’만 살펴본다.

제1수

후학은 따르기 아득하고 지름길도 띠 풀에 덮어

사람을 만나면 자주 하서 선생 이야기를 듣네.

옥처럼 빛나는 인품 누가 차지하려는가.

하늘처럼 높아 사다리도 쓸 수 없네.

제2수

갑자기 선정을 펼 길이 없어 원통함이 바다와 같으니

어찌 난산에서 꼭 취하고 싶어서일까?

진실로 충절이 뛰어남을 알 것이요.

시 짓는 솜씨는 이백 · 두보처럼 그 다지 중요하지 않다오.

김우급은 장성 사람으로 조부는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요월정 주인 김경우(1517∽1559)이다. 정유재란 때 김우급은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명나라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왜적을 피해 숨어 있는 우리 선비들과 부녀자들을 해치고 노략질하고 있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명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명나라 장군에게, "당신 나라의 군기는 이렇게 문란할 수 있습니까? 그래 가지고 어찌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할 수 있겠소"하고 따졌다. 그랬더니 명나라 대장은 크게 무안해 하고, 즉시 말 머리와 한 병사의 다리를 베어 벌을 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였다. 김우급은 1618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권신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 그는 인조반정 후에 목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 김장수, 청절당 제영 소감, 필암서원 산앙회보 25,26 합병호, 2015.12, p 15∽21

2) 김세곤 지음,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온새미로, 2012, p 272∽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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