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6)
길 위의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6)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4.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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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에서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필암서원 청절당의 중간 기둥에는 시판(詩板)이 세 개 있다. 권필과 김진옥 그리고 유근의 시이다. 

▲ 필암서원 청절당의 중간 기둥의 권필과 김진옥 그리고 유근의 시

석주 권필(1569∽1612)의 시는 초서체이어서 알기가 힘들다.

포은 선생 이후 하서 선생 나시니

우리나라 천년의 도가 다시 밝았네.

깨끗하기는 광풍제월 같고

정순한 옥은 금성을 울리는 듯하네.

참된 분은 신선되어 청운 속으로 떠나고

살던 마을 무심코 백록의 이름만 전하네.

후학 안동인 권필(權筆)이란 사람은

시를 써 애오라지 어진 분 공경함을 표합니다.

석주(石洲)

(김장수, 청절당 제영 소감, 필암서원 산앙회보 25, 26 합병호, 2015.12, p 18-20)

권필은 송강 정철의 제자이다. 권필의 아버지는 권벽으로 정철과 친구였고 골수 서인이었다. 권필은 정철이 강계에서 귀양살이 할 때 정철을 찾아가기도 했고,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정송강 선생 무덤을 지나면서’ 시를 짓기도 했다.

빈 산(空山)에 나뭇잎 지고 빗줄기만 쓸쓸해

상국(정철을 말함)의 풍류도 이처럼 적막하구나.

외롭게 한 잔 술 들었지만, 다시 권할 이 없으니.

지난 날의 <장진주사>가 오늘에 와 맞는구려.

(허경진 엮음, 석주 권필 시선, 평민사, 1990, p45)

권필은 호남과 인연이 많은 시인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해광 송제민의 사위이다. 1)

그는 1594년에 1차 호남여행을 1596년에 2차, 1599년 말에 3차 호남여행을 했다. 1600년에는 장성군 황계에 머물면서 조위한 · 조찬한 형제들과 함께 연작시 6수를 지었다. 조찬한은 고봉 기대승의 손녀사위이다.

또한 권필은 비운의 팔도의병장 김덕령(1567~1596)과도 인연이 있다.

권필은 꿈에 김덕령이 지은 시 취시가(醉時歌)를 읽었다. 꿈에서 깨어나 그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시의 제목이 무척 길다.

「꿈속에서 작은 책 한권을 얻었는데 바로 김덕령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시 한 편 제목이 ‘취시가(醉時歌)’인데 나는 두 세 번 읽어보았다. 그 가사는 ..... 이다. 꿈에서 깨고 뒤에도 너무나 서글퍼서, 그를 위하여 시 한 절구를 지었다.」

장군께서 지난 날에

창 잡고 일어났지만

장한 뜻 중도에서 꺾여지니

다 운명인 것 어찌 하리요.

지하에 계신 영령이여,

그 한스러움은 끝이 없지만,

아직도 분명한 한 곡조는

‘취했을 때 부른 노래(醉時歌)’라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석일파금과

壯志中摧奈命何 장지중최나명하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영령무한한

分明一曲醉時歌 분명일곡취시가

취시가 醉時歌

취했을 때 부르는 노래여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나는 바라지 않고

공훈을 세우는 것도

나는 바라지 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이요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뜬구름일세.

취했을 때 부르는 노래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네

다만 바라옵기는

긴 칼 잡고 밝은 임금 받들고자 함일세.

(허경진 엮음, 석주 권필 시선, p 83 –84)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취가정이 있다. 이 정자는 바로 취시가에서 비롯됐다. 2)

1611년에 임숙영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방종을 비판하는 글을 책문 시험에서 썼다. 광해군은 그 글을 보고 노하여 임숙영의 과거 급제를 취소시켜 버렸다. 이 사실을 알고 1612년에 권필은 외척들의 전횡과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풍자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

임숙영의 과거 급제를 취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 뜨락 버들 푸르고

꽃잎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성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떤다.

조정에서는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그 누가 위태로운 말을

한갓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

광해군은 크게 노했다. 권필은 붙들려 심문을 당하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갔다. 곤장 맞은 상처가 심한데다 친구들이 주는 귀양 전송 술에 과음하여 그는 서울 동대문 밖에서 죽었다. 향년 43세였다.

1) 송제민의 사위는 권필과 김극순이다. 김극순은 장성 남문의병장 오천 김경수의 둘째 아들인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권필은 광주광역시 운암서원에 송제민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2) 취가정은 서른의 나이에 모함에 걸려 죽은 충장공 김덕령을 추모하기 위해 1890년 후손 김만식 등이 세운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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