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견(22) 홀로코스트 기억 투쟁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견(22) 홀로코스트 기억 투쟁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03.1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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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70년대 후반에는 홍수가 되었다.

1978년에 미국 카터 대통령은 ‘홀로코스트 대통령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나이트』의 저자인 엘리 위젤이었고, 라울 힐베르크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1)

대통령위원회는 의회의 입법을 통해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로 승격되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93년 워싱턴 D.C.에 건립된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도 이 위원회의 보고서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라울 힐베르크 저 · 김학이 역,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p 1481-1495)

미국 유대인 조직들은 끈질기고 치밀한 작업으로 대중에게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확산시켰다. 1978년에 방영된 7시간30분짜리 TV 미니 시리즈 <홀로코스트>는 미국 대중을 사로잡았고, 1993년에 제작된 유대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는 세계인에게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인식시켰다.

1979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 1947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한 지 32년만이었다.

#2. 1985년 5월8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40주년에 서독의 바이체커 대통령과 콜 수상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바이체커 대통령은 종전 4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에 대한 성찰을 주문하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그 일부를 읽어보자.

“유대인들은 기억하고 있고, 계속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억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수백만 명씩 죽어간 그 경험이 이 세상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내면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처참함을 도저히 잊을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억은 유대인의 믿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망각(忘却)은 유랑(流浪)을 연장시키고, 구원(救援)의 비밀은 기억이다’

자주 인용되는 이 유대교 가르침은 아마도 신을 믿는 것은 역사(歷史)속에서 신이 역사(役事)하심을 믿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송충기, 나치는 왜 유대인을 학살했을까?, 2013, p 127-128)

한편, 서독의 콜 총리는 1985년 5월8일에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독일 군인묘지 방문 계획을 추진했다. 선택된 묘지는 비트부르크였다. 그곳에는 나치 친위대원 47명을 비롯하여 2천명의 병사들이 묻혀 있었다.

이 방문은 미국 유대인들이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이었고, 국무장관 슐츠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슐츠는 대통령의 일정을 변경하려고 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레이건 대통령에게 편지로 그 다음에는 전화로 비트부르크 묘지 방문을 고집했다. 콜은 전화 통화에서 레이건이 비트부르크를 방문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 위원장 엘리 위젤도 레이건 대통령에게 가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지만, 결국은 콜이 이겼다.

그러나 콜의 승리에는 대가가 따랐다. 나치와 만행과 유대인 학살의 역사가 그전보다 더욱 적나라하게 세상에 몸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라울 힐베르크 저· 김학이 역,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p 1481-1495)

#3. 1950∽60년대의 독일은 나치 시대의 사람들이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죽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980년 이후 젊은 세대가 전면에 나서게 되자, 이들은 아버지 세대의 부당한 행위를 묵인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천명했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면 그 자체가 처벌받는다는 조항을 법에 명시했고, 홀로코스트 가해자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앴다. 2)

이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기억 투쟁, “용서는 하마,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의 승리였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독일인의 의식 속에 각인시켰다.

1) 1986년에 엘리 위젤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 지금도 90세가 넘은 고령의 독일 친위대에 대한 기소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다.

안네 프랑크가 끌려갔을 때 아우슈비츠 위생병, 95세로 법정출두

(2016.9.13.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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