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함께 살다
강아지와 함께 살다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01.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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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아지 복동이와 함께 산다. 여섯 살 된 복동이는 말티즈 잡종견인데 건강하고 활기차다. 내가 외출을 하고 오면 반가이 짖어댄다. 복동이가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배설하고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무엇을 물어온다든지 재주 부리는 것도 할 줄 모른다. 완전히 자유롭게 산다.

그것에 비해 나는 강아지 때문에 하는 일이 꽤 있다. 우선 먹이를 구입해놓아야 하고, 강아지가 실례를 하도록 패드도 양껏 준비해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며칠에 한 번은 목욕을 시켜주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동물병원에 가서 미용과 몇 가지 예방주사도 맞혀야 한다. 복동이가 내게 해주는 것에 비해서 내가 돌봐줘야 할 일이 지나치게 많을 정도다. 그렇지만 불만스럽지는 않다.

복동이는 나와 한 침대에서 잔다. 방바닥에서 자라고 해도 침대로 올라온다. 복동이는 필시 내가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은 나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개’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름을 불러준다. 같이 오래 지내다보니 복동이는 가족이나 진배없이 되었다. 아니, 가족이다.

서구 작가들의 소개 글을 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아내와 딸 둘과 애견 ‘복동’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책에 쓰여 있다. 강아지를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한다.

오늘처럼 중국발 미세먼지가 하늘을 뿌옇게 만드는 날은 외출을 삼가고 주로 집안에서 지내는데 이럴 때는 강아지가 내 유일한 말상대가 된다. 내가 혼잣말로 하는 이야기를 복동이한테 던진다. 복동이는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가 하는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다.

나는 이따금 복동이한테 진지하게 말을 걸 때가 있다. “복동아, 내가 너를 돌봐주고 있으니까 그 보은으로 딱 한 번만 말을 좀 해다오. 말을 못하겠으면 ‘예’라고 한 마디만 해다오. 네가 예라고 말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으니.”

자못 진지한 마음으로 복동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몇 번 복동이를 부른다. “복동아, 대답 좀 해봐.” 복동이는 뭐라고 웅얼거린다. 나는 애써 그 웅얼거림 가운데서 ‘예’라는 말의 기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정말이지 나는 복동이가 나하고 교감하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쬐끔이라도 알려주었으면 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개가 인간과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복동이한테 사람과 개 이상의 어떤 친밀감을 갖고 싶어 해서다. 하기는 복동이 처지에서 본다면 되레 내가 복동이에게 개 짖는 목소리로 ‘통화’해달라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둘이는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한 관계이지만 몸짓이나 소리를 질러 대충 상대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복동이의 목 언저리를 긁어주어 친밀감을 표시하기도 하고, 복동이는 내 손등을 핥아주고.

복동이와 내가 언어로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이 있다. 하지만 심적으로는 서로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복동이는 아무 데나 배설하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는 앞발로 그릇을 긁으며 나를 쳐다본다. 물이 떨어졌을 때는 웅얼거린다. 그리고 내게 무한 충성한다. 그 충성이라는 것은 거의 순종적이요, 절대적이다. 모르면 몰라도 대신 죽으라고 해도 죽을 것 같은 그런 끈끈한 관계다.

이미 애완견 이상의 자리에 복동이는 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이가 애견이 아파서 수술을 했는데 물경 1천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음직하다.

서양에는 ‘동물권(動物權)’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다면 동물권도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동물을 학대한다든지 하면 처벌하는 그 비슷한 것이 있긴 하다. 아인슈타인이 동물이 살지 못한다면 인간도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동물을 흔히 미물(微物)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동물학대형 표현이다. 특히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가족권(家族圈)에 있는 동물이라면 복동이는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 여겨진다. 특별한 관계라는 말은 가족, 친구, 스승 같은 관계처럼 나와의 거리감을 표현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동이는 다른 어떤 개들과는 다른 생명체다.

수많은 개들 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거리 안에 가족이 되어 나를 향해 있다. “선생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누가 물을라치면 “복동이와 함께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하고 스스럼없이 말이 나온다.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복동이는 절친이 되어 바로 옆에 존재한다.

복동이와 나의 이런 관계를 누구에게 설명하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새해에는 사람살이가 더 팍팍해질 것이라고 한다. 삶이란 원체 힘들고 고단한 것이다.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세대가 1,500만 세대를 넘는다고 한다. 삶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애완동물과 함께 보내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설날을 맞아 독자 여러분도 동물 친구와 함께 이 한해를 견뎌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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