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17) 21세기 다시 태어난 윤회매, 다음(茶愔) 김창덕
남도의 멋을 찾아서(17) 21세기 다시 태어난 윤회매, 다음(茶愔) 김창덕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09.29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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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매 옆에 두고 차 한잔 마시며 나를 바라본다
밀랍으로 만든 매화꽃 윤회매(輪廻梅)
▲ 밀랍으로 만든 매화꽃 윤회매를 제작하는 다음(茶愔) 김창덕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날개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높이 날다 태양열에 의해 밀랍이 녹아 에게해에 빠진 이야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을 상징한다. 하지만 밀랍으로 시들지 않는 매화꽃을 만들어 차와 함께 여유를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 있어 찾았다.

2009년부터 양림마을에 위치한 이장우 고택 사랑채에서 작업실 삼아 기거하고 있는 다음(茶愔) 김창덕 선생을 만나 보았다.

이곳에서 그는 현실의 삶 속 네 가지 벗과 함께 한다. 14세 때 출가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던 차와 4천장이 넘는 음악 레코드판에서 찾아 듣는 음악, 먹을 이용한 그림그리기, 그리고 윤회매를 만들고 함께 하는 것이다.

‘차‘ 다(茶)’에 평화로울 ‘음(愔)’을 사용하는 그의 호에서 나타나듯이 차를 마시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혼자 마실때면 옆에 윤회매와 함께 한다.

▲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에 의해 창제된 밀랍화인 윤회매는 차 마시는 자리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이면서 차문화다.

이덕무 선생의 윤회매

다음 선생의 작품세계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 선생의 삶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서자 출신인 이덕무는 출생 신분이 낳은 필연적 가난과 고난으로 일상 자체가 고된 수행의 과정이었다.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에 의해 창제된 밀랍화인 윤회매는 차 마시는 자리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면서 차문화다.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고 그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그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니 이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윤회와 같다는 의미에서 윤회매(輪廻梅)라 이름 붙여졌다.

다음선생은 1996년 문헌을 통해 이덕무(1741~1793) 선생이 집필한 ‘윤회매십전’의 번역본을 보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사라졌던 윤회매 기술 복원에 성공했다. 이후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게 됐다.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 선생은 17살에 처음으로 윤회매를 만들고 그 제작 과정을 소상히 밝혀 <윤회매십전>이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이 200여년 뒤에 다음을 만나 재탄생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서자 출신이었음에도 여러 양반들과 차를 즐기며 깊은 교류를 나눴다. 다음 작가는 차를 좋아하는 취향부터 출신을 뛰어넘은 교류까지 그런 이덕무 선생에 대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 적당한 온도로 녹인 밀랍을 적절한 두께로 떠내 어린아이 새끼손톱만 한 매화 꽃잎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이나 섬세한 작업이다.

윤회매를 만드는 수행과정

윤회매를 만드는 것은 마치 수행의 과정과 같다. 적당한 온도로 녹인 밀랍을 적절한 두께로 떠내 어린아이 새끼손톱만 한 매화 꽃잎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이나 섬세한 작업이다. 꽃잎을 뜨기에 적당한 온도는 75℃라고 한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얇게 만들어져 부서지기 쉽고 온도가 너무 낮아서 만들어지면 꽃잎이 두꺼워지기 때문에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꽃술은 노루의 털을 사용한다. 털 끝에 황가루를 묻혀 다섯 장의 꽃잎 가운데에 끼워 꽃받침과 함께 단단하게 고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꽃과 꽃잎은 선이 고운 매화가지를 골라 그 위에 얹어 놓음으로써 한송이 윤회매가 만들어진다.

고서에는 이 윤회매를 화병에 꽂아두는데 현대적 스타일에 맞도록 평면 작업을 하여 화병에 꽂혀 있는 느낌 그대로 벽에 걸어두고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어떤 화병에 꽂아 두느냐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화병을 선택하는 일도 중요한 부분이다. 다도를 즐기며 다기를 접해봤던 안목으로 화병을 선택하는 다음 선생의 감각은 윤회매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가 만든 윤회매는 생매화와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하다.

차와 윤회매, 그리고 남도의 멋

“차 한잔을 마실 여유도 없이 너무 바쁘게 살고 있지요. 커피가 대중화 되면서 들고 다니면서 마시긴 하지만 진짜 차를 마셨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요.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시는 차도 있지만 저는 혼자서 마시는 차가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를 많이 마셔야 하구요.”

그래서 윤회매를 옆에 두고 옛 선인들은 혼자서 차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선비들이 매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추운 날씨에도 굳은 기개로 피는 하얀 꽃과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향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지폐에도 매화꽃이 피어 있어요. 천원권에는 이황 선생님과 함께 28송이 매화꽃이 그려져 있고 오만원권에도 어몽룡의 월매도 52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다음 선생의 매화꽃에 대한 애찬은 계속 이어진다. “꽃에도 품격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매화꽃, 국화꽃, 연꽃을 일품으로 여겼고 중국은 모란꽃과 매화꽃, 일본은 벚꽃과 매화꽃을 일품으로 여겼는데 이 세나라가 공통으로 매화꽃을 일품으로 여겼어요.” 그는 매화꽃의 은은한 향을 높이 샀다.

다음 선생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자기 생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이덕무 선생과의 만남이다. 꿈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으려나 꿈을 꿔보지만 만날 수 없는 그를 그가 남긴 책으로 만나고자 한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동아시아도서관에 있는 ‘청장관전서’ 원본을 한국으로 가져오고자 한다. ‘청장관전서’는 이덕무 선생이 생전에 집필했던 글을 엮어서 만든 고서다. 이 책 속의 ‘윤회매십전’에는 윤회매의 제작 방법이 고스란히 적혀있고, 그와 교류했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박제가와 유득공 등이 윤회매를 보고 느낀 감상을 적은 시도 수록돼 있다고 한다. 타국에 있는 원본을 고국으로 가져오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 선생에게 이곳에 터잡으면서 여러 작품 활동을 하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남도의 멋은 무엇인지 물었다. “멋스러움이나 아름다움은 겉모습만 꾸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요. 있음과 없음을 논한 화엄경의 유무등등처럼 광주를 품고 있는 무등산의 차등 없는 무등이 내면에 있다고 봐요. 윤회매를 만들기 시작한 이덕무 선생도 모든 사람이 윤회매를 옆에 두고 차를 마시면서 자아 성찰을 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음 선생은 국내보다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함부르크, 베네수엘라, 런던, 뉴욕, 가고시마 등 외국에서 더 알려졌다. 14세에 출가해 범어사, 태안사, 개암사 등에서 수행 후 1999년 파계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불교미술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종합예술가로서 윤회매 제작뿐 아니라 다양한 공연예술을 통해 작업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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