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18) 인당 이춘봉 악기장
남도의 멋을 찾아서(18) 인당 이춘봉 악기장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11.02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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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고 나섬이 확실한 멋, 가야금의 긴여운이 남는다.
▲ 인당 이춘봉 악기장

가야금과 거문고는 우리의 악기 중에서 오래된 현악기 중에 하나다. 12현의 가야금과 6현의 거문고는 우리들이 자주 접하지도 못할 뿐더러 즐겨 듣지도 못하는 우리의 전통악기다.

2000년이 넘는 전통을 갖고 있는 악기를 보존하고 제작하는 일을 하는 이춘봉 악기장은 전통악기 수호를 의무로 보지 않는다. 마냥 가야금 소리가 좋아서 배웠고, 배우다보니 제작 기술을 익히게 됐다. 자신의 손재주에 의해 전통악기도 복원하게 되었고, 그 바탕으로 현대적인 악기로 재탄생하게 됐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만들어진 가야금이 후손들의 손에 의해 널리 제작되어지면 그것으로 족하다.

가야금의 여운을 따라

매일 하루 일과는 4시 10분에 새벽 예배를 들이고 나서 시작한다. 그는 원래 전주 출신이다. 가야금 소리따라 71년도에 광주로 옮겨와 73년도 그의 나이 27세에 풍향동에 작업장을 열었다. 그리고 33세에 인당국악사를 개설하고 전통 악기 작업장을 만들어 전통악기를 만드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그는 지난 1978년 제3회 무형문화재 전승공예전에서 특별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공모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995년 광주시에서 처음으로 악기장 부문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는 가야금을 만드는데 있어 옛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 가야금 목재는 오동나무를 쓰고 머리 위 장식은 소뼈를 잘 다듬어 사용한다. 최고의 소리를 내기 위해 가야금에 사용하는 재료를 잘 선택하고, 특히 건조과정에 더 정성을 들인다.

가야금의 농현은 어느 타악기에서도 흉내 낼 수가 없다. 농현은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고 왼손으로 줄을 누르면서 본래의 소리에 여운을 남게 하는 연주 주법이다. 다른 악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섬세함을 농현을 통해 느낄 수 있다.

▲ 본인이 개발한 방법으로 제작된 가야금(일명 백년금)을 연주하는 인당 이춘봉 악기장.

사업성보다 즐길 수 있어야

이춘봉 악기장이 ‘인당국악사’라고 간판을 걸고 국악기를 제작하고 판매할 때 기술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사업으로 생각했다면 가야금을 더 좋은 쪽으로 개발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전통적인 소리를 간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면서 “자식들에게도 악기만 팔려고 기술을 배우려거든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춘봉 악기장에게는 세아들이 있다. 본인이 가야금 소리가 좋아 가야금을 배우다가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소리를 알아야 만들 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연구하게 되고 더 발전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가야금을 만들 때 오동나무를 깎는 것만으로 악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 깊이 깎아 보기도 하고 엷게 깎아 보기도 하는 감각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이 이 일인지라 직접 느껴 보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이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기쁠 때 슬플 때의 느낌이 잘 전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주도 할 줄 알아야 가능하다. 가야금의 생명은 그런 느낌이 연주하는 사람에 의해서 잘 전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가야금과 거문고 제작 기술을 전수하기 전에 먼저 배우도록 했다.

가야금을 만드는데 특허를

그는 작고한 김금향 선생을 찾아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웠고, 스승과 친하게 지냈던 김광주(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선생을 만났다. 김광주 선생으로부터 악기 만드는 기술을 전수 받고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성가 등 외국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음악에 거부감이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밴드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재주는 타고난 것이었다. 기계나 도구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전기 전자를 전공했기에 악기 만드는 일에 현대적인 기술을 접목할 수 있었다.

▲ 백년금

“벌써 46년째 가야금을 만드는데 기본적인 틀은 옛것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천년의 명맥을 이어온 가야금의 음색은 변함이 없다고 자부한다”면서 “악기를 상판과 뒷판 따로 만들어 붙이다 보니 세월이 흘러 뒤틀려 음색이 변하게 되는 것에 대해 연구를 하게 됐지요”라고 특허를 받게 된 백년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통 기술은 상판으로 사용하는 오동나무를 베어 오목하게 파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구하기도 어렵고 비싼 오동나무가 잘려나가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본인의 끼를 살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동상이 걸릴 정도로 추운 한 겨울에 오동나무를 구해다가 손실이 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상판을 깎을 수 있는 목공기계를 개발하게 됐다.

▲ 백년금

일일이 손으로 깎아내는 수고로움을 덜었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뒤틀림에 대한 해답은 얻지를 못했다. 계속 연구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처음의 그 소리를 간직할 수 있는 가야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그 악기의 이름을 ‘백년금’이라고 붙였다. 상판과 뒷판을 없애버리고 오동나무를 통째로 파서 한 판으로 악기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12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지시등이 켜질 수 있도록 했으며 조율을 하는데 편하게 만들었다. 특허를 받은 지 8년이 된 백년금으로 연주를 하면 그 깊이가 예전에 잘 만들어진 악기만큼이나 깊다고 한다.

중국에서 값싼 가야금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이 명인은 “가야금이 대중적인 악기가 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야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잘된 일이다”라면서 “최고의 악기는 값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지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명인은 또 광주 신창동에서 발굴된 BC1세기전으로 추정되는 10현금 현악기를 복원하는 작업도 했다. 이 현악기는 중국과 일본의 고대악기 관련 학자의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통해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의 독자적인 현악기라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남도의 멋이란

전주 출신이지만 71년에 광주로 이사온지 46년이 지나 광주 사람이 다됐다. 현재 있는 ‘인당국악사’는 남동성당 근처에 있다. 광주에 살면서 80년 5월도 그곳에서 보냈다. 본인도 어느결에 광주 사람이 다 된 것 같다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남도의 멋을 말해 주었다.

“남도 사람들은 불의를 보면 항거 할 줄 알고 들어서고 나섬이 확실한 것 같다”면서 “오동나무를 깎을 때 손날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더 깎아야 할 때는 더 깎고 남겨 둬야 할 때는 남겨둬야 하는 것처럼 가야금을 켤 때도 감정을 담아 격하게 연주하고 농현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멋이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사업으로 봤다면 악기장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2천년을 이어온 악기를 만드는데 본인이 개발한 방법으로 제작을 해 후대에까지 이름이 남겨지는 것만큼 앞날을 내다보는 큰 사업이 어디있겠냐는 말에서 장인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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