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역사, 제주4‧3항쟁
끝나지 않은 역사, 제주4‧3항쟁
  • 김민주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16.04.07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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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돗집에 숨언 살아낫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앗수다”

비를 가득 품은 제주의 하늘이 잔뜩 흐려 있다.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 같은 하늘이 불안하여 집행부스에서 나누어준 비옷을 챙겨 입었다.

4월 2일, 제주4‧3사건 탐방 길에 오른 우리 일행은 올해로 68주년을 맞는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에 새벽밥을 먹고 제주4‧3평화공원에 도착했다. 7시 30분부터 20여분 동안 위령제를 올리고 본 하늘은 여전히 눈물을 가득 머금고 촉촉하게 대기를 적셔가고 있다. 최근 4년간 4월 3일이 되면 어김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집행부는 참석자를 위해 비옷을 준비한다고 전했다.

본 식이 시작되는 10시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 있다. 인적 드문 제주4‧3평화공원의 길을 따라 기념관으로 향했다. 넓게 트인 위령탑의 순환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 널찍하게 세워진 검은 돌판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검은 돌판 위로 마을의 이름과 희생자의 성명, 4‧3 당시 연령과 사망일 등이 새겨져 있다. 희생자를 기리는 각명비였다.

삼도리-김종규, 30세 남, 1949년 봄경 행방불명/삼양리-김수종, 19세 남, 1949년 12월 15일 사망/아라리-김종화, 3세 남, 1949년 12월 18일 사망/토평리-오계춘의 자, 0세 남, 1948년 12월 30일 사망... 13세, 15세, 6세, 3세, 0세...끝도 없이 이어지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따라 내려가다가 나는 그만 눈길을 거두었다. 먹먹해진 가슴이 되어 문득 돌아선 눈앞으로 위령탑 주변의 넓디 넓은 둘레길을 따라 같은 크기의 검은 각명비가 어림잡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주욱 늘어서 있고 그 끝이 멀리 흐릿하다.

비를 머금은 하늘은 여전히 젖어 있고 대기는 축축했다. 하늘가를 선회하는 까마귀가 까악 거린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아빠였고 형제였고 누이였던 죄 없고 가없는 영혼들의 검은 시신이 이제는 칠순이 되고 팔순이 훌쩍 넘어 버린 그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각명비를 따라 열을 지어 살아나는 듯 했다. 나는 돌연 학살의 현장에 서있는 것만 같아 침통한 심정이 되어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4‧3 당시 희생자의 원혼을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한편 후세대에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 각명비는 비석 하나에 대략 40~50명의 희생자가 새겨 들어가 있으니 300개가 넘는 각 비문에 적힌 추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의 수는 족히 1만 4천명이 넘는다.

4‧3 당시 남북의 이념 대립과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립이라는 배경에서 발생한 이념과 사상의 갈등은 소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파국의 분란을 진압한다는 미명 아래 제주 중산간지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이어졌다. 제주의 무장대를 색출하는 일로 시작된 초토화작전은 마을에 거주하는 가족 구성원 중 한명만 보이지 않아도 마을 주민 전체를 집단 총살하고 암매장하는 학살의 형태로 진행되어 종국에는 3만여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2002년 처음으로 희생자 심사를 실시하여 2007년까지 결정된 ‘제주4‧3위원회’의 희생자 가해별 통계에 따르면 10대 미만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인, 여성의 희생자 비율이 전체 희생자의 33.2%를 넘는다.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기억되는 제주의 4‧3항쟁은 1947년 3‧1절 발포 사건을 그 촉발점으로 하여 이후 제주도 전체 민‧관 직장인의 95% 이상이 참여한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3‧10 총파업’을 거쳐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무장 봉기와 미군정의 강압이 계기가 되어 이승만 정부가 11월 17일 선포한 계엄령과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함으로써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장대한 시간과 국내외 다양한 배경 아래 발생한 제주 4‧3은 그래서 아직 그의 공식 명칭을 규정받지도 못한 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추념식을 갖고 있다.
4‧3사건의 ’대량학살계획’은 잃어버린 마을을 만들었고, 마을을 잃은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동굴로, 바다 건너 일본까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게 된다. 살아남은 자들은 국가권력에 유린된 그 날의 기억에 남은 생애 전체를 몸서리치다 생을 마감했다.

잃어버린 마을의 한 예로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에 위치한 학살 지역인 ‘양씨가족 공동묘지’에서 살아남은 박경생 할머니(작고)는 학살 당시 돼지우리에 숨어서 살아났는데 이후 할머니는 맷돌을 갈 때마다 “나는 돗집에 숨언 살아낫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앗수다”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시각, 제주4‧3평화공원은 각 마을에서 도착한 유족들의 물결로 술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추념식이 진행될 언덕을 향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바쁜 걸음을 옮기고 텅 비어있던 위령탑 둘레길의 각명비 앞은 그를 기억하는 유족들의 온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 곳 제주에는 해마다 4월 3일이 되면 각 마을 희생자의 유족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한다. 마을마다 유족이 있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도 그의 집안 누군가는 4‧3희생자의 유족이다. 4‧3 당시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는 이제 노년의 나이가 되어 비석을 닦고 음식과 술을 올리며 희생자를 기억한다.

추념식이 시작될 무렵, 부슬 부슬 내리던 빗줄기는 제법 굵어지고 바람은 차가워졌다. 옆자리에 앉은 80대 노부부는 “혹시 유족이세요?”라는 질문에 덤덤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가족 중의 누가 희생자인지는 묻지 못했다. 국민의례의 식순에 의해 제창하는 애국가도 차마 따라 부르지 못했다. 4‧3희생자의 유족인 이 80대 노부부가 시종 덤덤한 표정으로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부부에게 추념식에서 부르는 애국가는 어떤 의미일까?

2016년 4월 3일, 광주‧전남 지역의 주요 민주화운동의 주역들과 오월어머니들이 함께 참석한 4‧3희생자 68주년 추념식은 제주 대정여자고등학교 김다미 학생의 ‘2015년 전국 청소년 4‧3문예공모’ 시 부문 대상 수상작인 ‘제주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시 낭송으로 끝을 맺었다.

작은 섬을 맴도는 죽음을
한라산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작은 마을을 뒤흔든 총소리를
돌하르방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어미 잃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돌담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집을 잃은 가족의 허탈함을
바다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그 날 강자와 약자의 사이에서
그 날 오해와 진실의 사이에서
일어났었던 모든 일 하나하나를
제주도는 조용히 기억하고 있다.

가만 가만 읊조리는 여고생의 시 낭송과 함께 하늘은 비를 내리고 물기 가득한 하늘가로 까마귀가 까악 까악 선회하며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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