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서사물
시간과 서사물
  • 김병욱(충남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6.03.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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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욱(충남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폴 리쾨르는 1913년에 출생하여 2005년 작고한 프랑스의 세계적인 해석학적 철학자였다. 그는 30여 권의 책을 썼고 국내에도 『해석 이론』(서광사, 1994년) 이래 10여 권의 책이 번역되어 이젠 리쾨르의 해석학의 핵심이 무엇이며 서양 철학에서 그의 위상과 영향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나이 70세부터(제1권 1983, 제2권 1984, 제3권 1985) 해마다 1권씩 전 3권의 역저인 『시간과 서사물』은 그의 후기 저작의 대표작이다.

나는 이 책의 영역본을 1985년, 1986년, 1988년에 사서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from cover to cover) 읽었고 1990년에 대학원 강의에서 두 학기에 걸쳐 전권을 다루었으니 지금 생각만 해도 감개무량하다.

한국어 번역은 1999년부터 2004년 사이에 번역 출간되었다.(문학과 지성사) 우리나라 책 제명은 『시간과 이야기』로 되어 있다. 나는 우리나라 말 ‘이야기’는 하도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어 불어 ‘récit’, 영어의 ‘narrative’는 ‘서사물’이라 번역하여 사용하기로 고집한다.

인간은 시계를 고안하여 시각을 재었고 시간을 담는 그릇으로 서사물을 고안해 냈다. 누가 말했듯이 태양에 바래면 서사시가 되고 달빛에 바래면 서정시가 된다. 서사물 또는 서사 양식은 그 역사가 서정 양식보다 훨씬 길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서사물은 대설(大說), 꾸며낸 이야기는 소설(小說)로 분류했다. 소설은 누구나 지어낼 수 있었지만 대설(역사)은 누구나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서사물 속에서 허우적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주류는 소설이다. 아마 소설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전세계적으로 수천 만명에 달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는 수십 억 달러의 수입을 영국에 가져다 주었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 산다. 따라서 서사물의 작중인물들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 불가지론적 존재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나는 한국 소설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래서 리쾨르의 『시간과 서사물』에 관심을 가졌고 문학도는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강조 또 강조했다. 혹자는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꼭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러한 호한하고 난해한 책을 독파했다. 나는 민간수사법을 잘 구사한다. 쉬운 책만 읽다가 어려운 책을 읽으려면 수면제와 같이 졸리고 말 것이다. “빈대떡만 먹던 사람은 연한 뼈를 씹으면 이가 다 빠질 것 아녀?”라고 물어보고 싶다.

사실 인간의 행위는 어떤 틀에 비췬 은유이다. 그래서 리쾨르는 『살아있는 은유』를 지었고 더 넓은 세계로 확장하는 차원에서 이 『시간과 서사물』을 저술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시간을 담는 그릇인 서사물의 세계는 무한대의 세계인 것이다.

이 책의 제1부는 시간에 대한 이론과 서사물에 대한 이론을 각각 개별적으로 검토하여 궁극적으로 이 양자를 종합하여 서사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실존적이고 윤리적 조건과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제2부의 핵심은 역사 서술에서의 서사물과 시간의 형상화인데 여기에서 모든 역사적 시간이 갖는 서술성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제3부는 허구 서사물 곧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소설에 있어서의 시간의 형상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4부는 이 책에서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허구적 서사물에서 이야기된 시간의 여러 변주를 다루고 있다. 역시 대가는 남의 어려운 이론을 요령있게 요약해 준다. 공부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한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길인가를 알 것이다. 제4부만 읽어도 우리는 리쾨르의 창을 통하여 서구 250년간의 시간과 서사물에 대하여 만화경과도 같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이 30년 전인데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히 느껴진다. 리쾨르를 알려는 사람은 칼 심스의 『해석의 영혼 : 폴 리쾨르』를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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