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보고(寶庫), 양림
광주의 보고(寶庫), 양림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1.2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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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예술촌으로 새롭게 부상

기독교 선교지로 조망되었던 양림동이 대한민국 최고의 근현대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촌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1920~30년대 양림동에서 자란 소년들은 세계적인 음악가 혹은 한국의 대표 시인이 되었다. 광주의 어느 지역보다 앞서 근대문화를 접했고 시대의식이 치열했던 양림동에 강한 예술적 자장이 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항일의 예술혼 천재음악가들을 낳았다

중국을 울린 혁명음악가, 정율성

중국의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인 정율성(1914~1976)의 음악적 원천이 된 것은 양림동에서 보낸 소년기와 청년기였다.

▲ 양림동 정율성로와 거리전시관, 양림동 정율성로에는 정율성이 어릴 때 살았던 가옥과 함께 음악세계와 생애를 만날 수 있는 거리전시관이 있다. 거리 전시관에는 예술적 성과에 대한 설명과 악보 동판, 그의 대표곡을 들을 수 있는 감상 공간이 있다. 벽면에 설치된 방명록에서 중국인들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곳은 많은 중국인들이 찾는 곳이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외삼촌 최흥종 목사의 양림동 집에서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양림교회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한국 YWCA운동의 선구자인 외숙모 김필례(최영욱 초대 전라남도지사의 아내)도 광주 최초의 음악회를 연 인물로, 정율성은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정율성은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행진곡’과 중국의 아리랑이라 불리는 ‘연안송’ 등 360곡을 작곡해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가는 1992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곡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검은머리의 차이코프스키’, 정추

어린시절 양림동 외삼촌 집에서 피아노를 치던 정추(1923~2013)도 양림동이 배출한 천재 작곡가다. 정추는 외할아버지가 호남의 부호이면서 예술을 사랑했고 외삼촌이 베를린 음대를 졸업할 정도로 예술적 감수성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랐다.

여덟 살 때 노래를 작곡하는 등 일찍이 재능을 보였던 정추는 일본 니혼대 음악학과에서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한다.

정추는 차이코프스키음악스쿨에 유학했는데 졸업작품인 ‘조국’은 학교 역사 상 처음으로 만점을 받아 ‘검은머리의 차이코프스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300여 편의 관현악곡과 실내악, 칸타타 등을 작곡했고 카자흐스탄의 음악교과서에 60편의 곡이 실렸다. 소련 정부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했는데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쾌거 축하공연에서 그의 곡 <뗏목의 노래>가 연주돼 역사적인 순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음악과 영화에 생을 바친 예술 3형제

▲ 정추 삼형제 가족사진, 이념의 격랑 속에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이국을 떠돌아야 했던 작곡가 정추가 평생 음악에 담고 싶어했던 것은 민족혼이었다. 사회주의 영화감독이었던 형 정준채, 동요작곡가인 동생 정근 등 정추의 형제들은 ‘예술 3형제’로 불린다. 삼형제가 함께 있는 가족사진.
정추의 큰형 정준채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했고 사회주의 영화에 심취해 월북한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초대 서기장을 지내기도 했다. 막내 정근은 광주 서중과 대구사범대를 나온 뒤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다. KBS어린이 합창단 지휘자로 일했고 아동문학가와 방송작가로도 활동했는데 모두에게 친숙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로 시작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한 주인공이다.

■다형 김현승의 아우라가 살아있는 ‘시인의 마을’

김현승의 시가 잉태된 양림동산

김현승 시인(1913~1975)은 평양태생이지만 양림교회에 부임한 아버지 김창국 목사를 따라 7세에 양림동에 이사를 와, 교회를 다니고 골목에서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몸이 아파 양림동에서 휴양을 하기도 했던 시인은 양주동의 추천으로 1934년 동아일보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란 작품으로 데뷔했다.

시인은 해방이후 광주로 내려와 자신의 모교인 숭일학교 초대 교감으로 취임해 2년간 재직하고 1951년부터는 조선대 문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광주문학의 토대를 쌓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1960년 숭실대학으로 옮기면서 광주를 떠났지만 그의 많은 시들은 광주에 머물던 시절에 쓰여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0년대 초 광주지역 문학동인지 ‘신문학’ 창간을 주도해 왕성한 시작활동을 한다.

어린 시절 노닐던 양림 언덕과 아픈 몸을 휴양하며 고독과 함께 거닐던 골목길은 김현승의 시가 되었고 그런 만큼 시인의 양림동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김현승 시인의 존재는 양림을 시인의 마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권유로 조선대에 온 시인 서정주는 사직동과 양림동 경계부근에 살며 ‘무등을 보며’라는 시를 남겼고, 그의 추천으로 등단한 문병란, 손광은 시인은 물론 이수복, 김재흔, 김준태 등 많은 시인들에게 양림동은 각별한 감성과 위로를 주는 곳이었다.

■한국현대문학 명작들이 잉태된 곳

문순태 ‘징소리’, 황석영 ‘장길산’ 집필

김현승 시인뿐 아니라 양림동은 많은 문학인들의 고향이자 거처였다. 한국현대문학사에 의미있는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작가 문순태는 현재 양림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선 곳에 있었던 거처에서 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의 아픔과 한을 담은 ‘징소리’(1978년 발표)를 집필했다. 이 소설은 경제성장의 이면에 무너지고 있는 농촌의 삶을 그린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한국대하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1984년 발표)도 그가 양림동에서 살 때 쓴 작품이다. 황석영은 ‘장길산’을 쓰기 위해 광주 양림동에 둥지를 틀었지만 격동하는 시대는 그를 집필실 밖으로 자주 불러냈다.

황석영은 지난날을 되돌아본 글에서 ‘1980년 초 양림동 시절 문간의 사랑방은 청년회, 문화패, 여성회 등 사회문화운동을 했던 젊은이들로 늘 붐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신군부에 맞서는 문화운동을 했던 황석영은 극단 광대를 만들고 창립공연작으로 ‘한씨연대기’를 연습하는 한편 시간을 쪼개가며 ‘장길산’을 집필했다.

당시 그의 아내 홍희윤(필명 홍희담)은 1980년 5·18에 날마다 양림동과 도청을 오가며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투쟁소식을 알렸다. 8살 외동아들이 마음에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를 잊지 못했고 그들의 눈망울을 담아 쓴 작품이 1988년 발표한 ‘깃발’이다.

곽재구 시인이 1976년 쓰고 1981년 발표한 시 ‘사평역에서’는 양림동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남광주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사평역에서’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지만 시인은 남광주역의 심상과 풍경을 떠올리며 ‘사평역에서’를 썼다고 밝혔다. 젊은 시절 광주천을 걸어 남광주역을 무수히 오간 시인은 천변의 불로동과 양림동의 작업실에서 많은 시들을 썼다.

‘첫사랑’의 드라마 작가 조소혜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작가인 조소혜는 1990년대 주말 밤 안방을 사로잡았던 이다. 역대 한국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65.8%)한 ‘첫사랑’(1997)과 뜨거운 화제를 낳았던 ‘젊은이들의 양지’는 방송드라마사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기록돼 있다. 양림동에서 40여 년을 살았던 작가의 작품은 힘겨우면서도 따뜻한 삶속에서 피어난 서민들의 사랑과 갈등을 담고 있다.

■양림동에서 자라고, 양림동을 그리고, 지켜온 화가들

양림동에서 자란 한희원, 최인준

음악과 문학향기 짙은 양림동은 우리가 사랑하는 화가들과의 인연 또한 깊다. 양림동이 고향인 한희원과 최인준은 양림동에서 자랐고, 현재 양림동에 거주하면서 활발하게 창작하는 작가들이다. 또 근대역사문화마을인 양림동을 지키고 가꾸는 데 의미있는 역할들을 하고 있다.

한희원은 사랑, 위로, 예술의 양림정신을 나누기 위해 지난해 양림동 한옥을 개조해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062-653-5435). 또 양림의 축제인 ‘굿모닝 양림축제 조직위원장’을 맡아 의미있는 행사들을 꾸려왔다.

오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양림동으로 돌아온 최인준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제자로 친가인 최승효 고택에 현대미술 작품으로 채운 갤러리를 열고 작업실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무등산 화가 배동신,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등 거주

작고한 화가로 양림동과 인연이 있는 이는 배동신과 이강하다. 독창적인 한국수채화의 영역을 개척한 배동신은 일본에서 돌아와 양림동에 거주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가 많이 그린 무등산 연작 등 풍경화는 무등산을 화폭에 담은 많은 화가들의 그림들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암출신 화가 이강하는 5·18 이후 2년 동안 양림동 친척집에 머무르면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었는데 무등산과 영산강을 많이 그렸다. 그는 살아생전 양림동을 고향처럼 느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양림동과 인연이 있는 화가들로는 학강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출신인 서양화가 우제길, 젊은 시절 작업실을 양림동에 두고 작품활동을 했던 서양화가 황영성,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등이 있다.

한편 양림동에는 한희원미술관, 최승효고택의 갤러리 외에도 양림동을 주제로 기획전을 많이 열고 있는 515갤러리, 남구청이 운영하는 양림미술관 등이 있다.

■영화와 연극, 드라마의 주인공 양림동 사람들

양림동의 정신과 예술가들의 삶이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격정의 독립운동가,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했던 선교사, 항일 천재 음악가 등 양림동 사람들의 삶은 극적인 휴먼드라마이자 뜨거운 역사의 이야기다. 영화감독, 연출가, 시나리오, 드라마 작가들이 양림동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영화감독 이장호를 광주로 부른 ‘서평과 흥종’

한국영화사의 화제작 ‘별들의 고향’, ‘바보 선언’을 제작한 이장호 감독이 2014년 광주로 근거를 옮기고 양림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100년 동안 숨어있던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에 끌렸다는 이장호 감독은 “민초들의 아버지인 최흥종 목사와 ‘양림동의 성녀’ 서서평을 다룬 ‘서평 흥종’(가제)을 생의 대작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뮤지컬 대부 윤호진이 만드는 ‘정율성’ 뮤지컬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킨 뮤지컬 연출가 윤호진이 ‘정율성’의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 100년사 연극시리즈 ‘오방 선생’, ‘정율성’

최근 무대에 올려져 화제가 됐던 광주 100년사 연극시리즈의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 주인공 모두 양림동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광주시립극단은 2014년 오방 최흥종, 2015년 정율성의 삶과 예술을 그린 연극작품을 광주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렸다.

한편 이국땅에 사랑을 심었던 서서평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한일장신대학교에서 제작한 창작뮤지컬 ‘서서평’도 2014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무대에 올려져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드라마·영화 매력적인 촬영지

▲ 음악의 추억 깃든 옛 고택 이장우 가옥, 전통 한옥의 그윽함과 아름다운 나무들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양림동의 이장우 가옥은 작곡가 정추 형제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양림동에 있던 대규모 농장인 양파정의 농장주였던 정낙교의 아들 정병호가 이 가옥의 옛 주인이다.
2016년 개봉예정작인 영화 <해어화>는 최승효 고택에서 전통한옥의 미를 보여주는 장면을 촬영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인간과 구미호의 사랑을 그린 판타지드라마 <구미호외전>에서 구미호전사로 나오는 김태희가 사는 집으로 등장했다. 또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드라마 <너를 기억해>를 촬영했는데 주인공 이현이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장우 가옥에서는 영화 <위험한 상견례1>를 촬영했는데, 전라도 출신 신랑과 경상도 신부의 험난한 사랑의 여정을 그린 로맨틱코미디 영화이다. 오웬기념각에서는 만화가 허영만의 작품을 각색한 방송드라마 <각시탈>이 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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