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겨울이 오면
  • 문틈 시인/ 시민기자
  • 승인 2015.12.03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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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창으로 내다봬는 먼 산 봉우리에 흰 눈이 내렸다. 눈에 덮인 산줄기의 굴곡이 힘줄처럼 선명해보인다. 한참을 먼 산으로 보냈던 눈길을 거두고 창 난간에 동글동글 매달린 말간 빗방울들을 본다. 지난 밤 이 마을에 비가 내렸나보다.
갑자기 온몸이 떨린다. 춥다. 안방으로 들어가 난방을 켜고 며칠 전부터 새로 구독한 신문을 펴든다. 굵은 글자로 박힌 뉴스들. 테러, 인질극, 이슬람국가 폭격, 시리아난민 승선 배 침몰, 수출 6년만에 감소세, 내년 부동산 전망 불투명, 불법시위 엄단… 등 제목들만 훑어보고 신문을 접어 치워둔다. 신문을 보기로 한 결정이 살짝 후회스럽다. 조간신문의 소식들이 이렇게 우울하니 더 그렇다.

한길엔 붕, 붕, 부지런히 질주하는 차량들. 이른 시각에 다들 어디로 가고 오는 것일까. 흡사 개미떼를 보는 느낌이다. 땅바닥에서 개미들은 무슨 일로 늘 바쁘다. 이 놈은 저리 가고, 저 놈은 이리 오고. 산봉우리에 얹힌 겨울만이 이런 세상사와는 냉랭하게 멀리서 저 혼자 희게 빛나고 있다.
겨울은 모든 계절들의 끝을 여미고 혼자 고고한 이마를 빛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자의 가게들이 밤이 깊어 문을 닫듯이 겨울은 계절들을 닫아걸고 저 혼자서 오랜 침묵, 아니, 새로운 잉태의 시기로 넘어간다. 겨울에게도 힘든 기간이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죽어버린 듯한, 차갑고 어두운 날들이 오고 있다. 하지만 겨울이 없다면 또한 봄도 없을 것임을 안다. 빈 나뭇가지들, 사라진 풀잎들은 오랜 겨울을 인내하고 단련받아 겨울 속에서 화려한 봄을 설계하고 있을 터. 그러기에 창문을 흔드는 세찬 한풍, 휘, 휘, 전깃줄을 울리는 듯한 맹렬한 바람소리, 그리고 뿌리까지 얼어붙게 하는 추위를 견디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라고. 그 누군가는 필시 겨울을 바라보고 그런 소식을 깨달았으리라.
부엌창으로 을씨년스러운 바깥 풍경을 보노라니 샛강에는 백로 몇 마리와 청둥오리떼가 미끄러지듯 잔잔한 물살을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다. 저것들은 발 시린 것도 모르나싶다. 이따금 저녁 하늘에는 백로가 한 마리 두 마리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저것들은 스스로 겨울 풍경이 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처럼 겨울은 두 눈을 관찰자의 그것으로 바꿔준다. 생명이랄까, 색깔이랄까, 그런 것들의 오고감을 명상케 한다. 모처럼 관찰자가 되어 저녁 창밖을 보면 밤하늘의 별들조차도 무슨 생명체처럼 보인다. 하늘에 불을 켜기 시작하는 오붓한 생명 같은.
안방. 벽에 걸린 달력의 마지막 장. 눈에 덮인 밭고랑의 푸른 보릿잎을 가리키며 탄허스님이 ‘한 겨울 속에 봄이 있다.’고 하신 어록이 풍경소리처럼 다가온다. 정말 관찰자의 낮은 시야에는 세상이 속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떤지 깨달음이 없다.

이 집은 아파트단지에서 귀퉁이 한갓진 곳이라 더욱 겨울의 매서운 눈빛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기필코 겨울 속에서 봄을 찾아보려니 한다. 만일 그런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이 겨울을 보낼 수 있을까. 사람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저기 벌거벗고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도 소망을 간직하고 겨우살이에 들어갔으리라.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 갑자기 겨울이 고마운 손님처럼 여겨진다. 생각이 뒤집히는 느낌이다. 모든 푸른 내력에는 수많은 겨울의 추위가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노라니 겨울이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강림한 계절이라는 깨우침이 든다. 다른 계절들은 땅에서 일어난 것들이라면 겨울은 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라는.

그러므로 엄동설한, 빈 나뭇가지에서 울어대는 매서운 바람, 햇살에 빛나는 산길의 눈, 폭설, 영하 20도의 얼어붙은 공기, 춥다, 춥다, 끼룩거리며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떼… 이런 겨울의 풍경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겨울이 오면 신문에 나오는 모든 소음에게 잠잠하라고 일러주리라. 나무는 여름이 어서 오라고 발을 구르지 않는다고 릴케는 말했다. 겨울로부터 그런 한 소식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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