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재상, 백사 이항복 (1)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재상, 백사 이항복 (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5.10.29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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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1556-1618). 우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해학과 기지의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오성. 임진왜란 7년 전쟁을 극복한 1등 공신.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 유배지에서 별세한 올곧은 정승.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재상이었다. 그의 후손이 이회영 · 이시영 6형제이다. 이들은 1910년에 조선이 망하자 전(全)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항일독립운동을 한 불굴의 애국자들이다.

이항복은 태어나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고 사흘 동안 울지 않았다. 우참찬인 아버지가 근심하여 점을 쳤더니 점쟁이는 “근심할 것 없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귀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6세 때는 칼과 거문고를 빗대어 ‘칼은 장부의 기상을 가졌고, 거문고는 천고의 음을 간직했다“고 글을 지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불운하게도 그는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2살 때 그는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남을 구제하는 뜻이 있었다. 한번은 새 옷을 입었는데 헤진 옷을 입은 이웃 아이가 그것을 보고 입고 싶어 하자 즉시 벗어서 주었다. 또 신발을 남에게 주고 맨발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이에 어머니가 나무라자, 그는 “갖고 싶어 하여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만큼 그는 물욕이 없었다.

이항복은 15세에 골목대장이 되었다.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씨름과 제기차기를 잘하였다. 홀어머니가 통렬히 꾸짖자 그때야 잘못을 뉘우치고 학문에 힘썼다.

16살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자 그는 누님 집에서 자라다가 18세에 권율의 딸과 결혼했다. 영의정 권철이 이항복의 영특함을 높이 사 손녀사위로 삼았다 한다. 서울 배화여고 건물 뒤에 필운대가 있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도원수를 한 권율장군이 살던 집인데 이항복은 여기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래서 젊은 시절 그의 호는 필운(弼雲)이다.

이항복은 1580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나이 25세였다. 20세의 이덕형도 함께였다. 두 사람은 대제학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는데, 이들은 ‘오성과 한음’ 명콤비로 평생 지음(知音)하였다.

어느 날 오성과 한음은 관악산 염불암에 올라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염불을 하였다는 효령대군의 심정에 대하여 회상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세조에게로 옮아갔다.

먼저 이항복이 말했다. “여보게 한음, 효령대군과 세조의 마음을 비교해 보니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네. 효령대군은 양위하려고 불교에 귀의한 척 하였는데 세조는 임금이 되려고 조카까지 죽였으니.”

이덕형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사람은 의리를 지켜야 하고 사리사욕을 버려야 하는데.” 두 사람은 상념에 잠겼다.

1592년 4월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자 4월30일에 선조는 피난을 갔다. 도승지였던 이항복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한양을 빠져나와 노숙(露宿)하면서 6월22일에 의주에 도착하였다. 한 달 반의 힘든 노정이었다.
1592년 말에 이덕형은 명나라로 가서 원병에 성공하여 이여송이 이끄는 5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1월초에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윽고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에 이항복은 병조판서로, 이덕형은 접반사로 참석했다. 연회 도중에 이여송은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것을 알고는 의아해 하며 한 마디 하였다. “조선은 사대부끼리 동성혼인을 합니까? 이는 오랑캐들이나 하는 일 아닌가요?”

은연중에 조선을 깔보는 발언이었다. 순간 조선 대신들은 당황하였다. 성(姓)이 같아도 본(本)이 다르면 혼인할 수 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 하였다. 그 때 이항복이 나섰다. “이덕형은 원래 성이 계(季)씨입니다. 그래서 이산해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헌데 계덕형의 공이 많아 선조께서 임금님의 성을 하사하시어 그때부터 이덕형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여송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졸지에 계덕형(잘못 발음하면 개덕형이 된다)이 된 이덕형은 이항복을 짐짓 흘겨보았고, 이항복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이항복은 해학과 기지가 넘쳤다. 반면에 이덕형은 차분하고 진중하였다 한다.(1613년에 이항복은 이덕형의 묘지명에서 ‘이덕형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며 순박하고 근신하여 함부로 유희(遊戲)를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하면서 류성룡 · 이원익 · 이덕형등과 함께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이항복은 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1604년에는 호성(扈聖)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선조를 한양에서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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