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떠도는 모자
바다를 떠도는 모자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5.08.1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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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름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더니 집 앞 개천 너머 밭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는 밭고랑에서 노란 참외와 녹색 개구리 참외를 따서 내게 주었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맛이 달콤한 참외라는 것을 처음으로 먹어보았던 것 같다.
그 장면이 할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영상 장면이라고 한다면 내게 평생 잊지 못할 미션을 준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엄한 분부로 자막처럼 잊히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참외를 깎아주시면서 내게 말했다. “얘야, 네가 크거들랑 흑산도 바다에서 잃어버린 내 모자를 찾아다 다오.”

할아버지는 그해 여름 피서여행으로 흑산도에 갔다 오셨다. 서당 훈장을 오래하신 탓에 여기 저기 제자들이 초청을 하기도 했는데 휴가 겸 흑산도로 가셨던 모양이다. 그때는 흑산도가 아주 먼 길이어서 내가 듣기로는 배가 거의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가 하면서 근 10시간 가까이 항해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흑산도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지금까지도 흑산도를 가본 일이 없다. 어린 시절에 흑산도로 가는 거친 바다가 무섭게 각인되었던 탓이 크다.
할아버지는 갑판 위로 올라와서 넓고 푸른 바다가 보여주는 풍광을 즐기셨다. 그런데 풍광에 넋을 읽고 있는 새에 그만 해풍이 할아버지가 쓰고 있는 모자를 휙 날려버린 것이다.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며 바깥나들이 때면 으레 공식 의관의 하나로 삼던 중절모는 배가 만들어내는 거센 물굽이에 휩쓸려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것을 할아버지는 고물에 서서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 쬐그만 손주 녀석의 손을 잡고 더 크면 흑산도 바다에 가서 할아버지의 그 모자를 찾아오너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나는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수영을 못하는 탓에 바다가 무서웠던 데다가 설령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 한들 망망한 바다 어디에서 할아버지의 모자를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내가 낫살이 더 먹고 나서 할아버지께서 진짜배기로 그 모자를 찾아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어떤 비유로 내게 하신 말씀으로 나는 해석했다. 이제 나도 할아버지처럼 내 후손에게 무엇을 찾아오라고 할 나이가 되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미션을 받고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는 말이다. 인생이란 그냥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는 숭고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너무나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 같다. 아무런 목적도, 소망도 없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말이다.
할아버지의 모자는 그 동네는 물론 인근 마을에까지도 하나의 앰블럼 같은 것이었다. 그 모자는 곧 할아버지를 상징했다. 할아버지가 평생 이룩한 성취요, 권위요, 정체성 같은 것이었다. 출타 중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오른 손으로 살짝 벗어들었다가 도로 쓰셨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최대의 경의 표시였고, 인사였다.

그러니까 그 모자는 할아버지에게 있어 왕관 같은 것이었다고 할는지. 우연이라고 믿지만 할아버지는 그 모자를 바닷바람에 잃어버리고 난 그해 늦가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모자를 못 찾아드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의 그 모자 말씀은 지금까지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 상상 속에서 할아버지의 모자는 지금도 흑산 바다를 떠돌고 있다. 바다와 바다와 바다를 사시사철 떠돌고 있다. 할아버지의 그 모자는 내 삶의 미션을 비유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흑산도 앞 바다에서 읽어버린 모자를 지금 이 혼란스런 도시에서 찾고 있는 중이다. 내가 죽어서 할아버지를 뵈온다면 잃어버린 모자에 대해서 반드시 무엇이라고 답변을 해야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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