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외 (四畏)
4외 (四畏)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5.08.0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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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에 다산 기행을 하였다. 사의재와 다산초당, 다산수련원과 다산기념관을 두루 다녔다. 2014년 7월에 개관된 다산기념관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삶이 시기별로 잘 설명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의 전시물이 압권이다. 정면에 4외(四畏)가 적혀있고 목민관과 아전의 조각상이 있다.

牧民者 有四畏 목민자 유사외

下畏民 하외민
上畏臺省 상외대성
又上而畏朝廷 우상이외조정
又上而畏天 우상이외천

오른편 벽에는 “부령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로 부임하는 이종영(李鍾英)을 전송하는 서(序)”가 적혀있다.

목민관은 네 가지를 두려워해야 한다.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고
위로는 대성 臺省(감찰기관)을 두려워해야 한다.
또 그 위로는 조정을 두려워하고
또 그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글은 다산이 1819년에 함경도 부령도호부사로 부임하는 이종영(1791-1836)을 전송하는 글이다. 이미 정약용은 이종영이 1812년에 영암군수로 발령이 나자 편지를 보내 7가지를 당부한 바 있다. 여기에는 3염(三廉)이란 글도 있다.

청렴함은 밝음을 낳나니 (廉生明)
사람이 그 마음을 숨기지 못 할 것이요,
청렴함은 위엄을 낳나니(廉生威)
백성들이 모두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청렴함은 곧 강직하게 되니(廉則剛)
상관이 감히 가벼이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종영의 아버지 문산 이재의(1772-1839)는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남인인 정약용과 평생 교유하였다. 이재의는 아들이 영암군수로 근무하자, 1813년 여름에 거처를 영암으로 옮겼고 1814년에 다산초당에서 다산을 만나 학문을 토론하였다.

1818년에 정약용이 해배되어 고향 남양주로 돌아가자, 이재의도 서울로 거처를 옮겼고 이들의 교유는 지속되었다. 1832년에 정약용은 이재의의 회갑에 축하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다산이 이종영에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보자.

보통 목민관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상 대간과 조정뿐이고, 백성과 하늘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간과 조정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먼 경우에는 천 리나 되고, 더욱 먼 경우에는 수천 리나 되니, 이목(耳目)으로 살피는 것이 혹 두루 상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성과 하늘은 바로 앞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임하고 몸으로 거느리고 호흡(呼吸)을 함께 하고 있으니, 그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가장 밀접한 것은 이 백성과 하늘인 것이다. 무릇 도를 아는 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민심이 곧 천심이니 목민관은 백성과 하늘을 두려워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라는 충고이다.

한편 <목민심서> ‘율기 6조’ 제1조 칙궁(바른 몸가짐)에도 4외(四畏)가 적혀 있다. 이를 살펴보자.

<치현결(治縣訣)>에서는, “벼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오직 ‘두려워할 외(畏)’자 한 글자뿐이다. 의(義)를 두려워하고 법(法)을 두려워하며, 상관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마음에 언제나 두려움을 간직하면, 혹시라도 방자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허물을 적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義)는 정의(正義)이다. 맹자는 “의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義, 人之正路也)‘이라고 하였다. 법(法)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공정하고 올바른 것이다. 본받아야 할 도리이다.

그런데 <목민심서>의 4외와 다산이 이종영에게 보내는 글의 4외는 다르다. <목민심서>는 의와 법, 상관과 백성이 4외인데, 이종영에게 보내는 다산의 글은 백성과 하늘, 대간과 조정이 4외이다.

이러함에도 공통점은 ‘백성을 두려워하라’이다. 정도전의 말처럼 민본(民本), 백성은 근본이다. 무릇 위정자 · 공직자는 깊이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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