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날들
사라져가는 날들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5.07.1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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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엊그제'라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지나간 날들은 ‘엊그제’에 가 있다. 더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엊그제에 가서 머물러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는 학생이라 불리웠는데, 청년이라 불리웠는데, 아저씨라 불리웠는데, 지금은 아니다.
눈을 감고 되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한 저 찬란한 젊은 날들은 누구 말대로 꽃이 시들 듯이 시들어버렸다. 세월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흘러간 과거는 쏜살같이 초고속으로 내 앞을 지나가버렸다. 예컨대 지나간 10년 전, 20년 전을 되돌아보아도 바로 엊그젯 적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셈할 것도 없이 앞으로 내게로 다가와 지나갈 10년, 20년이란 것도 지난 세월처럼 금방 지나가 엊그제가 되고 말 것이리라. 바로 말하면 이제 나는 늙어갈 일밖에는 없다.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지금의 내 자리의 실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한 문장으로 쓰지는 않을 작정이다. 인생은 덧없다는 식으로는. 결코 덧없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어서다. 무엇이 무엇인지 늘 생각했고,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존재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주어지는 고통을 용서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세월 앞에 옷깃을 여미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제와 결론이다.

나는 ‘엊그제’ 썼던 그 모자, 이삿짐에서 발견한 알록달록한 예비군 모자의 먼지를 털어내 머리에 얹고는 아무렇게나 입은 노숙자 스타일의 옷을 걸치고 숲 속으로 난 조롱길을 걷는다. 숲에서 새나오는 가지가지 야생초와 나무와 꽃들의 향기로운 내음을 흠뻑 들이마신다.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을 음미한다.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가. 인간은 세월의 노리개라고. 어쨌거나 숲길에서 나는 내게 다가올 날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매 시간을 값지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늙는다는 것은 낡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는 잘 익어가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행운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믿는다. 만일 그때 거기 있었더라면, 그때 그쪽으로 갔더라면, 그때 병에서 회복되지 못했더라면…. 수많은 나쁜 가정법의 고비를 용케도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 이것이 진정 기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기적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매일매일 기적을 살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너도 나도 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 프랑스 화가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자연은 제2의 성서라고 한 그 러시아 출신의 내가 좋아하는 화가 이름이. 이런 식으로 엊그젯 적 친지들의 이름이 깜박깜박할 때가 있다. 금방 하려고 한 일을 잊어버릴 때도 있다. 뭐, 이러다가 나중에는 아주 중요한 이름이나 일들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들도 그렇단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염되는 무슨 바이러스가 옮기는 질병 같은 것은 아닐까. 좌우지간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 때문에 인생에 아름다움이 번득인다고 생각한다.
만일 사라져가는 것들이 없이 늘 있는 것들이 영속한다면 아름다움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사라져가는 것들은 쇠약해져서 마침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엊그제에 남아 살아 있는 내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사실 인생이란 기억의 누적일 것이리라.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주 사라져버리지 않고, 내 기억의 한 켠, 즉 엊그제에 오롯이 쟁여 있다는 것이 내 어슴푸레한 생각이다.

영화배우 최은희 씨가 “너희는 늙어봤니?”하고 말한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기막힌 표현이다. 인생은 경험이 기억이 되어 누적되는 과정에서 탑이 되기도 하고, 평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한탄하고 있을 일은 아닌 듯하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 설령 그것들이 내게 고통을 안겨 준 것들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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