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길을 걸어요(1) 고려말 영웅, 정지 장군 기리는 ‘경열로’
함께 길을 걸어요(1) 고려말 영웅, 정지 장군 기리는 ‘경열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5.05.28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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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해와 도로명 유래 알게 하는 표지판 없어 아쉬움

도로명 주소로 바뀐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도로명 주소가 잘 정착되고 있는지, 시민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도로명과 그 유래는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터이다.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 '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로 도로명 홍보에 나선다./편집자주

경열로가 시작하는 상록회관 앞 육교에서 바라본 모습
경열로는 상록회관 앞 육교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서 시작한다. 경열로 1번지는 상록회관에서 서구청쪽 길 건너에 있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으나 현재는 정보통신 사무실이 1번지다. 2번지는 이 1번지 길 건너에 위치한 건재상사다.

이 2번지에서 1번지를 묻기 위해 만난 건재상사의 아주머니는 “여기가 경열로 2번지다요. 1번지가 어딘지 모르겄는디. 요 옆일까?”라고 반문한다. 그럼 여기 도로명 주소가 경열로인지는 아느냐고 묻자, 그는 “농성동으로 알제. 경열로였는지는 몰랐는디”라고 답한다. 왜 경열로인지, 그 유래를 아느냐는 물음에 “모른다”고 손사래를 친다. “아주머니, 이말 신문에 다 실을께요”라고 하자, “안다고 써야제. 모른다고 쓰면 쓰겄어”라며 웃는다.

새로 지어진 서구청은 경열로 33번지다.
한국전력 서광주지사는 경열로 43번지다.
한국전력 서광주지사 앞 육교에서 바라본 경열로 모습. 멀리 돌고개가 보인다.
경열로는 상록회관 앞 육교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서 시작해 새로 단장한 서구청(경열로 33번지), 한국전력공사 서광주지사(경열로 43번지)를 지나 돌고개로 이어진다.

돌고개에 대한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지명의 유래와 역사를 엿보기 어렵지만 구전에 따르면 ‘돌산 지역의 야트막한 고개’다. 과거에는 광주 서부 외곽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고개이자 관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열로는 다시 호남 최대의 전통시장인 양동시장, 양동과 유동을 가르는 양유교, 일류극장에서 개봉이 끝난 2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했던 추억의 아세아극장을 지나 유동사거리에 이른다.

호남 최대의 전통시장인 양동시장.
양동복개상가도 경열로와 함께 하고 있다.
일류극장에서 개봉이 끝난 2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했던 추억의 아세아극장은 현재 한창 리모델링 중이다.
유동사거리에 광주역까지의 경열로에서는 ‘나라시’ 택시와 버스들이 손님을 부르는 외침이 눈에 선한 옛 광주고속터미널의 추억과 송원백화점에서 현대백화점으로 지금은 NC백화점으로 세 번이나 이름이 바뀐 백화점, 그리고 바로 옆 꽤 오래된 삼양사 건물도 만날 수 있다.

이 경열로는 최근 지어진 삼성생명빌딩(경열로 276번지)이 있는 광주역 광장 앞에서 태봉로와 제봉로를 만나면서 2900m의 6차선 도로의 이름을 내려놓는다.

경열로라는 이름의 마지막 지점 모습
경열로 위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체적으로 경열로라고 하는 도로명은 알고 있지만, 왜 경열로라고 이름지어졌는지는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열로의 끝자락에서 만난 3~4명의 시민들에게 이 도로가 경열로인지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한다. 왜 경열로라고 이름이 지어졌는지 아느냐는 질문에는 모른단다.

이를 통해 도로명 주소는 어느 정도 정착이 되고 있지만, 왜 이렇게 이름지어졌는지에 대해선 시민들이 많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경열로라고 표기된 요소요소의 도로안내판은 볼 수 있었지만 경열로라고 이름지은 이유나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표지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움이 큰 대목이다.

경열로가 시작한 지점이나 끝지점에 시민들이 관련 역사와 도로명에 대한 이해를 더 잘 하게 도와줄 표지판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농성광장에서 광주역까지 숱한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 경열로는 고려말 왜군을 섬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정지 장군의 시호인 경열공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9년 광주광역시장이 고시했다.

이 도로의 주인공인 경열공 정지 장군은 1347년 나주 문평면 죽곡에서 태어나 19세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20세(공민왕 15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의 나이 27세때 중랑장이 되어 공민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왜구를 토벌할 수 있는 방안을 건의해 전라도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가 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순천, 낙안, 영광, 동복, 광주 등지에서 왜구소탕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특히 1383년 경상도 남해의 관음포에서 왜선 120여척이 침입해 오자 불과 47척의 배를 이끌고 출전, 대첩을 거뒀으니 이것이 바로 관음포해전이다.

1388년 요동정벌이 추진되면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의 회군시 함께 회군했으며,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자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공로를 세웠다.

이 때문에 의향 광주의 시작을 정지 장군에서 찾으려는 일각의 시선도 있다.

정지 장군은 말년에 새 왕조 창업이라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고려 왕실을 붙들다가 유배되고 옥에 갇히는 등 불행하게 보냈다. 광주에 은거하던 정지 장군은 45세에 병사하게 된다.

1402년(조선 태종 2년) 경열의 시호가 하사되고, 1645년(인조 23년) 동명동에 경열사가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지고 말았다. 이 경열사는 후손들에 의해 1981년 북구 청옥동에 복원·준공됐다. 경열사로 들어가는 은행나무 가로수는 꽤 아름답다고 알려졌다.

한편 광주 5·18의 상징 도로인 금남로의 주인공이 된 금남군 정충신 장군은 그의 9세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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