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1)
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1)
  • 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4.0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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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우리나라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발견
관광자원·콘텐츠 물색 중인 전남, 유배 문화자원 곳곳 산재
유배문화에 대한 별도 관리·보존·발굴 필용한 시점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아, 내 중년의 유배생활은 예서 시작되는가?”

유배(流配)는 TV드라마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소재다. 상투를 틀었던 조선시대의 죄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함거(檻車)라고 불리는 소달구지에 실려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과 달리 보통 양반의 경우 유배지는 먼 길을 걸어서 가기엔 힘이 너무 들어 말을 이용했다고 한다. 돈이 많지 않았던 평민의 경우는 고난의 길을 직접 걸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자연환경 우수한 반면 낙후된 환경 ‘전남’

유배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낯선 이유는 오늘날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처벌은 사형, 징역형, 벌금형 등만 있기 때문이다.

따스한 봄기운이 전남에 가장 먼저 찾아온 가운데 중죄인을 중앙으로부터 멀리로 쫓아내고 옛 우리 선조들이 겪어왔던 유배문화에 관련한 인물, 장소,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유배를 가장 많이 보냈던 1순위 장소는 왕도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던 전남지역과 섬으로 보내졌다. 죄지은 사람을 ‘멀리’ 내쫓을 수 있던 최적의 유형지였다.

그렇다면 왜 전남과 섬 지역에 유배를 보내게 되었을까. 전남과 섬 지역은 때 묻지 않았던 우수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던 장점이 있었지만, 중앙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소식과는 단절되어 낙후된 곳이 많았다.

   
 
한때는 잘 나가며 학문과 식견이 넓었던 이들은 지은 죄로 인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처음엔 낙후된 환경의 지역주민들과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점차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중앙에서 경험했던 수준 높은 문물을 전해주고 지역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을 뿌리기도 했다.

반대로 유배인 스스로가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 지역의 토착문화나 민속, 예술 등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문이나 예술적 자질들을 발전시킨 측면도 있다.

이 유·무형적인 모든 것을 포함해 유배인들이 유배지에서 생활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관련 유산들을 오늘날 ‘유배문화’라고 일컫고 있다.

커다란 혼란 겪은 18세기 이후 유배 급증

이처럼 유배지는 꼭 비극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김만중의 걸작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정약용의 걸작 ‘목민심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 우수한 문학작품과 가르침 등이 유배지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다.

우리나라의 유배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거슬러가 조선시대까지 중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운용되었다. 그 중 조선시대의 형벌은 중국의 ‘대명률(大明律)’ 5형에 의거하여 집행했다. 5형은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으로 추방형인 유배는 유형에 해당한다.

중국 대명률에 나온 유형에 따르면 장 100대를 치고 2천리 밖으로 추방, 장100대를 치고 2천 5백리 밖으로 추방, 장 100대를 치고 3천리 밖으로 추방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영토가 작았기 때문에 가장 멀리 떨어진 전남, 인적이 드문 외딴 섬 지역으로 주로 보내졌다.

유배를 보내게 된 이유는 유교사상과 왕권정치가 존재했기 때문에 권력 남용, 양반들의 부정부패 행위, 사회적 물의, 임금의 도장 도용 등 죄인을 멀리 보냈다. 유배인은 왕족부터 양반, 중인, 평민, 천민, 여자아이까지 다양했고, 친인척의 죄까지 엮이어 가문 ‘전체’가 흔들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지난해 리전인포 김준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이흥관 연구원에 의해 발표된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재발견과 관광자원화 방안’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남지역 유배인은 총 534명으로 대부분 중앙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관료들이거나 양반 출신이라고 조사했다.

시기별로 14세기는 3명(0.56%), 15세기 82명(15.36%), 16~17세기 59명(11.05%), 18세기 178명(33.33%), 19세기(36.70%), 20세기 전반 16명(3.0%)로 18세기 이후 급증하게 된 이유는 신임사화, 나주벽서사건, 신유박해,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세도정치, 왕위계승 등 커다란 혼란이 빈번히 일어났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례 통해 전남 유배문화 활용방안 찾아

이번에 <시민의소리>가 기획한 ‘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 기획취재에서는 고려 입장에서 ‘역적’, 조선입장에서 ‘왕조 설계자’인 삼봉 정도전의 나주 유배생활,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서 19개월동안 지내며 시, 글씨, 그림 등 예술의 꽃을 피웠던 우봉 조희룡,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청소년들에게 교육 시켰던 손암 정약전 등의 스토리텔링을 담은 이야기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타지역의 사례 중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지내며 걸작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남기게 된 서포 김만중,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지내며 자연을 벗 삼아 학문과 예술, 불교, 경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업적을 남겼던 추사 김정희의 흔적을 찾아 관광자원의 활용사례를 점검해 보고, 되짚어본다.

해외사례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고 있는 러시아를 찾아 모스크바에서 무려 5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토의 땅인 이르쿠츠크로 유배를 당했던 혁명을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이다.

이렇듯 학문이나 문물에서 뒤쳐져 있었던 지역에 유배인들이 오게 되면서 그 지역의 생활이나 사상에 큰 영향을 주고, 문물을 전파할 수 있었던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재들은 지역향토문화자원으로 스토리텔링을 통해 현시대에 맞게 재조명해 관심을 끌만할 지역관광 콘텐츠로 개발할 가치는 무한하게 높다.

전남지역에 다수 분포해 있는 유배문화가 존재하고 있는 유배지 현장을 찾아가 ‘힐링’과 ‘관광’을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해 모두가 가고 싶은 전남이 되는 날을 기약해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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