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2)
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2)
  • 나주=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04.08 1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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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나주 세장산 고랑 舊소재동, 現 백동마을에 자리잡아
소재동기, 순박한 농민의 삶 그대로 나타나 현재와 비슷
조선시대 전남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은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형의 최적지였다.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유배인을 맞았던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21세기에는 ‘유배’라는 형벌은 없지만 지난날 유배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시민의소리>에서는 역사 자원으로 중요성이 높은 ‘유배문화’를 집중 조명해 전남의 관광 및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례와 방안을 찾아 기획보도 시리즈를 연재한다.<편집자주>

1. 프롤로그 - 유배문화의 새로운 가치
2.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전남 나주를 찾다
3.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4. 전남 신안군 임자도(조희룡), 흑산도(정약전) 유배문화 흔적을 따라서
5. 남해유배문학관(서포 김만중)의 어제와 오늘
6. 조선시대 유배지 1순위, 제주 추사 김정희 유배길
7. 러시아 이르쿠츠크① 시베리아의 유배문화의 산실, 새로운 역사를 쓰다
8. 러시아 이르쿠츠크② 볼콘스키, 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1
9. 러시아 이르쿠츠크③ 트루베트코이,데카브리스트의 도시에서 유배문화를 엿보다-2
10. 유배문화 집결지 남도, 역사·문화 콘텐츠의 재발견

   
 
4월을 맞이하는 첫 주말,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던 오전과 달리 나주의 백동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비구름이 점점 몰려오고 있었다.

백동마을의 입구에는 ‘삼봉 정도전선생 유배지(三峰 鄭道傳先生 流配地)’ 표지판이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어 삼봉 정도전(1342~1398)이 머물렀던 유배지를 무난하게 찾을 수 있었다.

최근 TV에서 정도전을 재조명한 드라마가 방영될 정도로 그의 정치적 신념은 대단했다. 유배문화에 관련한 인물을 재조명하여 문화콘텐츠 발굴, 그 흔적을 찾아 떠나는 첫 여정은 삼봉 정도전 유배지다.

▲나주 백동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크고 웅장한 노송(老松)들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3년간 머물렀던 나주 소재동 유배지

나주 백동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크고 웅장한 노송(老松)들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조선의 개국 공신인 삼봉 정도전 선생이 살았을 때도 있을법한 나무들이었다. 마을 회관을 지나 신소재동비가 세워져 있다. 인근에는 백용 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삼봉의 유배지는 백동마을 입구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숨어있는 듯 했다. 오늘날의 모습은 양 옆에 농사를 시작하지 않은 듯 한 논과 세장산 뿐, 허허벌판이었다. 이 앞에는 유적비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가 나주에 도착해서 어떤 생각을 가장 먼저 했을까?

정도전, 그를 짧게 소개하면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 무인, 유학자, 시인, 외교관, 정치가, 유교사상가, 유학교육자이며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다. 그는 다방면으로 출중했고 매우 머리가 명석하고 몸은 민첩했다.

그는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 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업적은 방대하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지지하던 신진사류인 삼봉은 고려 우왕 즉위 원년, 당시 친원파인 권문세족과의 정치적 갈등 때문에 유배를 당했다.

이후 정도전은 34세부터 36세에 이르기까지 이곳 나주 소재동에서 3년간 머물렀다. 현재는 백동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곳은 유배 당시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인 거평(居平)땅으로 소재사(消災寺)라는 절이 있어 ‘소재동’이라고 불렸다.

민본사상 깨우치게 된 배경되기도

정도전이 머물렀던 유배지의 모습은 세장산이 2칸 남짓한 작은 초가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은 세장산이 안고 있는 형세로 오른쪽에 자리 잡아 있어 포근하게 보였다. 이 좁은 곳에서 욕심 없이 덧없이 살았구나 느껴졌다.

나주에서 그의 유배생활은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을 갖게 된 소중한 시기였다. 백성의 아픔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시기였다. 삼봉집 소재동기(消災洞記)를 살펴보면 당시 유배생활이 어떠했는지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가까이 다가가 초사를 살펴보니 유배를 와서 사람들을 바라보던 정도전의 모습이 그려진다. 초사에서 내려다보면 논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 나무를 하러가는 사람들을 내려다 지켜볼 법한 곳에 위치해 있어 이곳에서 민본사상과 그의 정치적 신념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시었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나는 겨울에 갖옷 한 벌, 여름에 갈옷[葛] 한 벌로써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기거동작에 구속되지 않았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그리하여 그 두세 학자들과 강론하다가는 개울을 따라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는데, 피곤하면 휴식하고 흥이 나면 걷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이리저리 구경하며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느라고 돌아갈 줄 몰랐다. 어떤 때는 농사꾼 또는 시골 늙은이를 만나, 싸리포기를 깔고 앉아서 서로 위로하기를 옛 친구처럼 하기도 하였다.” (소재동기消災洞記 中)

2칸 남짓한 정도전의 초사 복원시켜

그는 이곳에 와서 풀도 베지 않고, 나무도 깎지 않은 채 흙을 쌓아 마당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어 두 칸 초가집을 지었다. 초가를 짓는 일이 간략하고 힘도 적게 들어 마을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며 완성됐고, 이곳을 초사(草舍)라 했다.

당시 정도전은 “내가 이곳을 떠나면 이 초사는 비바람을 맞고 들불에 타서 썩어 흙덩어리가 되어 후세에 과연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를 일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도올 김용옥은 삼봉에 대해서 “그가 전하는 것은 초사의 이름이 아니요, 조선 왕조를 일관한 민본(民本)사상이요, 인민의 삶과 정신을 혁신한 토지개혁, 종교개혁 등의 영구혁명론이다”며 “그 사상이 동학, 의병, 독립운동, 광주민중항쟁을 거쳐 오늘 우리사회의 개혁정신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소재동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혁명의 샘물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이곳은 덩그러니 삼봉의 유배지만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에는 아무런 휴식공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을 남겼다. 초사 앞에는 실제로 누군가 기거하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하얀 고무신이 놓여있었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군데군데 뻥뻥 뚫린 창호지 사이로 초사 내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초사 안에는 정도전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나주시 역사도시사업단 김종순 팀장은 “예전에 지냈던 정도전의 초사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소멸됐지만 나주시에서 복원시켰고, 나주정씨 문중이 자리를 빌려준 것이다”며 “예전에는 이곳이 포장도 안 된 울퉁불퉁한 길이였는데, 포장하지 말자는 입장을 펼쳤었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정도전이 귀양을 와서 실제로 황량한 느낌을 그대로 살려 방문객들도 느꼈으면 했었다”며 “삼봉의 후손이 나주문화원으로 찾아와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주에 사는 사람으로 미력한 힘이나마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도전의 소재동기, 스토리텔링 가치 높아

지난해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이 ‘호남지역 여행문화의 흔적을 찾아서’를 주제로 제12회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당시 첫 번째 발제로 ‘나주·회진 유배지에서 정도전의 여정과 성찰을 발표했던 남부대 류창규 교수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류창규 교수는 “삼봉 정도전의 유배생활 이야기는 다른 유배인들과 비교해서 기록 자체가 많이 부족하다”며 “정도전이 정치적으로 성장한 이후에도 나주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더라면 더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류 교수 역시 ‘소재동기’를 보면 정도전의 유배생활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류 교수는 “소재동기만큼 진솔하게 나타난 기록물이 없다. 몇 가구 정도만 사는 사람들의 순박한 이야기들을 담아 내용자체가 큰 이슈를 주지는 않지만, 평범한 농민의 가정을 기록한 내용은 현재와도 비슷한 시골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물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도전은 나주 유배생활로 인해 백성들과 농민들의 생활을 피부로 느꼈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는 ‘소재동기’를 스토리텔링 한다면 콘텐츠 개발할 가치는 충분하다.

이에 대해 류 교수는 “소재동은 예전에 영산강이 더 컸을 때 이 지역은 습하고 안개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앞으로 삼봉 정도전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한다면 마을공동체 사업 등으로 접목시켜 백동마을 입구에 정도전과 관련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자원활용에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배를 당했던 삼봉 정도전이 머물렀던 나주 백동마을은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골마을이다. 앞으로 ‘남도 유배지, 문화 관광자원의 재발견’을 통해 소개될 전남 지역의 유배지, 관련 인물 재조명을 포함해 삼봉 정도전의 나주 유배지도 또 하나의 문화콘텐츠 개발지역으로 포함될 수 있도록 문화적 관심과 행정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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