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떡
수수떡
  • 문틈 시민기자/시인
  • 승인 2015.03.04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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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만주에서 돌아오던 때의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사흘 밤낮을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굶주리며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밤중에 학다리역에 겨우 내렸는데 허기진 몸으로 어둔 시오리 밤길을 걸어 집까지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해서 어느 시골 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집에서 손님 요기하시라고 내왔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인지 모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맛이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이 있었다.

떡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을 하신 탓에 비교적 잘 드시고 살아오신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때 먹어본 음식은 혀를 놀래게 할 만큼 세상에서 처음 맛본 지독하게 맛있는 음식이었다.
배가 등에 달라붙는 듯한 허기를 달래는 중에도 할아버지는 호기심이 일어 이 음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아주 조금 떼어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내일 아침 일어나 자세히 살펴보려니 하고. 할아버지는 곯아떨어져서 아침 늦게야 깨어 일어났다. 그리고는 간밤에 먹었던 그 음식 쪼가리를 찾아보려고 머리맡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렇게도 맛이 있었던 음식 쪼가리는 보이지 않고 볼품없는 웬 수수떡 부스러기가 말라붙은 채 있을 뿐이었다. 방바닥 장판은 여기 저기 구멍이 나있고, 창구멍도 숭숭 뚫린 가난한 집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한참 생각을 해보았다. 간밤에 내가 얻어먹은 그 음식이 이 볼품없는 수수떡이었단 말인가. 수수떡은 할아버지가 꺼끌꺼끌하고 맛도 없어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이었다. 그런데 이 집 주인댁 아주머니는 수수떡을 어떻게 만들었길래 그토록 맛이 있었을까.
할아버지는 암만 해도 이 수수께끼가 풀리질 않았다. 염치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조심스레 주인댁 아주머니에게 말을 붙였다.

“간밤에 낯선 과객을 재워주시고 음식까지 대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드리리다." 주인댁 아주머니는 초라한 입성을 한 모습으로 “누추한 집에 잠자리도 불편하고 음식도 대접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며 몹시 미안해했다.
그런 판에 수수떡이 어찌 그리 맛있는지를 묻는 것은 엄청난 결례가 될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는 몰래 수수떡 부스러기를 종이에 싸들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고향집에선 몇 달 만에 돌아온 할아버지를 환영하느라 분주했다. 닭도 잡고, 돼지고기도 삶고, 나물도 무치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불러 말했다. “수수떡을 먹고 싶으니 만들어 주시오.” 할머니는 오랜만에 고향집에 돌아오셨는데 이 판에 웬 수수떡이냐며 그것은 나중에 만들어 드리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수수떡이 먹고 싶다며 간청을 했다. 그 시절 수수떡이나 옥수수 음식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이 특별한 주문이 좀 어이가 없었지만 만들어 놓았다.

할아비지의 귀향을 환영하는 식사는 잔치나 다름없었다. 가까이 사는 친척들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들 중국 소식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만주는 사흘 밤낮을 기차를 타고 가도 산이 안보이는 끝없는 평지라는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울엔 소변이 나오는 그대로 얼어붙는 추위에 모두들 독약 같은 돗수 높은 술을 들이키며 산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큰 빵을 베개 삼고 잔다는 말에는 기가 막힌 모습들이었다. 만주에도 호남사람, 영남사람들이 사는 마을들이 있어서 중국말을 안 쓰고도 살 수가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호기심은 절정에 달했다. 저마다 만주에 가면 좋겠다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는 중에 누군가가 만주에서 무엇을 가장 맛있게 잡수셨느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맛있는 음식을 물었소?” 그러더니 허리춤에서 종이로 싼 수수떡 부스러기를 꺼냈다. 닭고기며 삶은 돼지고기를 한참 먹던 사람들이 일순 시선을 집중했다. “이것이요. 이것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내가 세상 태어나 먹어본 일이 없소.”
작은 수수떡 조각을 보며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몇 년 만에 귀국해서 어젯밤 학다리 어느 집에서 얻어먹은 수수떡이오.” 밥상을 함께 한 친척들은 할아버지가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웃지도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내 이제사 알았소. 음식탐을 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말이오.”

할아버지가 지난 밤에 겪은 이야기를 듣고 친척들은 모두들 할머니가 구해온 수수떡을 한 조각씩 떼어 먹었다. 마치 최고로 맛있다는 듯이.
나는 할아버지기 해준 이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누가 “점심 어디 맛있는 식당 가서 먹을까.”라고 할 때면 가슴이 살짝 아려온다. 호강에 초친다는 말이 있다. 요즘 시대는 너무들 잘 먹고 산다. 그것이 많이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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