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목 놓아 통곡할 날이요!
오늘이 목 놓아 통곡할 날이요!
  •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5.02.2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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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日也放聲大哭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05년 11월20일 월요일 새벽에 <황성신문>이 경성 곳곳에 배포되었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이 쓴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렸다. 해가 뜨자마자 신문을 보던 시민들은 울분과 허탈에 쌓였다. 대한제국이 하루아침에 일본의 보호국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일야방성대곡> 일부를 읽어보자.

이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만든 것인즉 이토 히로부미의 원래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 할 것은 이토도 스스로 잘 알았을 것이다.
오호라,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정부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하였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심하게 꾸짖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했더라 말이냐. (중략)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노예 된 2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황성신문에는 <시일야방성대곡>에 뒤이어 <오건조약 청체전말 五件條約 請締顚末>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는 11월18일 새벽에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 날 경성의 번화가 종로 풍경은 이러했다.
“맵게 몰아치는 11월 하순의 음산한 찬바람이 옷자락을 마구 흔드는데,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큰 소리로 신문을 읽던 중년 선비가 방금 읽은 황성신문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외쳤다. ‘그렇소! 오늘이야말로 목을 놓아 울 때요! 참으로 목 놓아 크게 울어야 할 때요! 그러나 운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소! 나는 결코 울지 않으리다!’ … 무리 속에 있는 장년의 사내가 크게 대꾸했다. ‘그렇지요! 울어서 국사(國事)가 바로 잡힌다면야 오늘 우리 국민 그 누가 방성대곡을 아끼겠소.’ 그런데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황성신문>의 파장이 엄청 나자, 일본경찰은 당황하였다. 곧바로 신문 회수 작업에 나섰다. 신문은 평소 3천부보다 세배가 넘은 1만부가 인쇄되어 서울 전역과 지방에 배포되었는데, 일본경찰은 서울에서 800부를 회수하고, 지방으로 보낼 2,288부를 압수했다.
또 일본 경찰은 <황성신문>이 일제 경무청 검열도 받지 않고 신문을 발행한 것을 문제 삼아 장지연을 구속하고 <황성신문>을 무기 정간하였다. 장지연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황성신문>은 1906년 2월에야 속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국인 배설이 발간한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이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하였다’며 그 의기를 높이 평가했다. 또 11월27일자로 순한문과 영문으로 된 호외를 발행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다
한편 영국의 <더 타임즈>, 미국 <뉴욕타임즈>등 외국신문들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여론은 싸늘하였다. 영국 ․ 미국 등 열강들이 이미 일본의 한국에서의 권리를 인정한 지라, 외국 신문들도 일본에 동조하거나, 방관적인 입장이었다.
11월20자 영국의 <더 타임즈>는 ‘일본과 한국, 협약에 이르다’ 제하로 한국의 일본의 협약과정을 보도하며, 한국은 앞으로 극동지역의 태풍의 눈에서 벗어나 발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에 11월22일자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사라지는 한국’ 제하로 장차 대한제국의 황제는 영국 통치 아래의 인도 국왕의 지위로 전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11월 하순의 을씨년스러운 날씨처럼 조선의 백성들은 울분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약 무효화와 을사오적 처단 투쟁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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