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국
보릿국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5.01.2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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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남도의 별미는 밥상에 올라오는 보릿국이다. 눈밭의 눈을 헤치고 파릇파릇한 어린 보릿잎을 솎아 온 싱싱한 보릿잎을 잘 씻어서 멸치와 다시마로 우린 물에 된장을 풀고 여기에 다진 마늘을 넣고 끓인 후 보릿잎을 넣어 만든 보릿국이다.
겨울 속의 상긋한 봄의 향기와 보릿잎이 입 안에 씹히는 쫄깃한 식감, 그리고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남도의 향토가 자아내는 구수하고 깊은 맛을 자아낸다. 해남이나 무안 같은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은 한 가지 더 홍어 애를 넣은 보릿국을 일품으로 친다. 바다가 좀 먼 곳에서는 홍어 애가 흔한 것도 아니고, 설령 그것이 없다 해도 맛이 덜한 것은 아니다.
보릿국에는 냉이 나물이 들어가도 잘 어울린다. 경상도 출신인 내 아내는 시집와서 처음 맛보는 보릿국을 낯설어했는데, 함께 오래 살다보니 이제는 남도의 본고장 보릿국맛을 재현할 정도가 되었다. 보릿국의 쉐프가 된 것이다.
맛이란 것은 누구나 어릴 적 어머니 손맛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보다 설령 더 맛있다는 것을 먹어본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 맛에는 조금 못 미치는 맛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머니의 손맛은 일평생 최고의 자리를 누린다.
나는 특별히 보릿국에서 어머니와 고향의 맛을 느낀다. 어찌 보면 우리는 일평생 어머니의 맛이라고 하는 감옥에 붙들려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 광주 출신의 유명한 화가 오지호 화백의 아침 밥상이 소개된 어떤 잡지를 본 기억이 남아 있는데, 조촐하고 정갈한 밥상에 차려진 쌀밥 그릇 옆에 사기 대접에 담긴 보릿국이 퍽 인상적이었다.
하기사 탈북민들이 ‘남조선’에 와서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맛이 최고라고 하는 음식이 옥수수 가루를 물에 개어 뚝 뚝 떼어먹는 옥수수떡이라니 어머니와 고향의 맛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고향의 유년시절 음식맛이 우리 몸의 유전자에 새겨진다고 하면 지나칠까.
이번 겨울에도 나는 보릿국을 즐겨 먹었다.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가 구해놓았다가 보내주신 보릿잎으로 끓인 보릿국을 먹으면서 남도와 어머니와 내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나는 돌아간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앞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가 내준 홍차와 마들렌 과자를 맛보며 옛날의 아슴한 기억, 즉 잃어버린 시간의 실마리를 잡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보릿국 역시 단순한 밥과 짝하는 국이 아닌, 내가 잃어버린 유년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첫 문장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서울로 시집을 간 남도 여자가 부잣집 마나님으로 살게 되어 좋다는 음식은 이것저것 다 먹고 지내다가 어느 때 어린 시절의 보릿국이 불쑥 생각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향에 보릿잎을 보내달라 해서 보릿국을 끓여 한 숟갈 떠먹고는 “에이, 풋내가 나서 못 먹겠다.”며 물렸다는 일화를 전해주신 어머니는 “너는 몇 십년을 해마다 먹고도 보릿국이 질리지도 않느냐?”고 애정어린 눈길로 나를 보며 이번 겨울에도 보릿잎을 눌러 담아주셨다.
나는 겨울에 보릿국을 먹어야 그해 겨울을 공식적으로 영접하고 배웅하는 절차를 치른 느낌이 든다. 나에게는 보릿국과 겨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고향 남도의 선조들은 그 옛날부터 보릿국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하얀 눈에 덮인 밭고랑으로 파릇파릇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한겨울 아침 밥상에서 보릿국을 떠먹는 순간 당신의 핏줄 속으로 봄기운이 스며든다는 것을 안다면 보릿국은 징하게, 진짜, 더욱, 맛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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