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절모를 쓴 남자
중절모를 쓴 남자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4.12.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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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를 하나 샀다. 내가 쓰고 다니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바깥 출타시엔 늘 중절모를 쓰고 다녔다. 길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중절모를 오른 손으로 가볍게 벗어들고 예를 표했다. 그것이 인사법이었는데 멋있어 보였다.
내가 중절모를 쓰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나에게는 큰 사건이나 진배없다. 나란 사람은 구제불능이어서 몸에 거추장스러운 것은 일체 사절하는 판이라 모자 같은 것은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데 나이가 들어가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성글어진 머릿칼 때문에 정수리가 얼음판 같은 차가움을 느낀다. 백년해로로 가고 있는 아내가 나를 위해 내놓은 묘책이라는 것이 중절모다. 중절모를 쓰면 훨씬 젊어 보인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처음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으나 머리통이 쨍하고 어는 것보다는 훨씬 낫고 숭숭 탈모가 진행된 머리통을 가리는 데도 딱인 듯싶어서 동의하고 말았다.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 서니 앗, 거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났다. 깜짝 놀랐다. 말 맞춰 먹으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거울 속에 지금 내 나이 때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 일부러 웃어보았다.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는 아버지의 모습. 나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놓아두고 간 아버지의 그림자였음을 깨달았다.
과연 나는 아버지처럼 마음이 너그러운가. 밀린 할부 외상값을 받으러 섬에 갔다가 채무자가 너무 가난하게 살고 있어서 오히려 돈을 보태주고 오신 아버지처럼 살고 있는가.
홍수 뒤 끝에 물이 불어 실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새까만 개미떼를 위해 손가락을 잇대 다리를 만들어주어 개미들이 모두 무사하게 건너게 해준 아버지를 얼마만큼이나 닮았는가. 중절모를 쓴 모습은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하는 행동거지는 영 다르지 않는가.
나는 어떨 땐 시끄럽고, 패로 갈라지고, 깨지고, 힘센 몇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놈의 세상이 한번 확 엎어져야 한다고 주먹을 쥘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얘야, 우린 육이오때도 살았단다. 너무 걱정 말고 네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거라.” 그랬다. 중절모를 쓰고 계셔서 그랬는지 그 말씀에는 토를 달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국회의원아니 교수들의 말보다 훨씬 더, 더.
어쨌든 중절모를 쓰기로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을 쬐끔이라도 닮아보려 한다. 그래야 아버지도 저 세상에서 흐믓해 하시지 않겠는가.
중절모를 쓰고 오늘 작은 모임에 갔다 왔다. 몇 사람은 모자 앞이 손바닥처럼 나온 ‘도리구찌’을 쓰고 있었다. 어쨌든 중절모를 쓴 내 모습이 남에게 생뚱맞게 보이든 말든 이제부터 나는 중절모를 쓴 사람이다. 새해를 앞두고 썩 잘한 생각인 것 같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어린 내 손을 잡고 “얘야, 네가 언제 흑산 바다에 가서 잃어버린 내 모자를 찾아다 주렴.” 부탁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여행 중 뱃전에서 바람에 날려버린 할아버지가 아끼던 중절모. 그 모자를 찾아 지금 내가 쓰고 다닌다고 생각하기로 하니 중절모는 단순한 나의 패션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해 내 사는 모습이 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인사법은 할아버지표로 할지 어쩔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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