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는 꽃
늦게 피는 꽃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4.12.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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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떨군 채 가로수들이 앙상하게 서 있는 모습들이 몹시 추워 보인다. 계절은 한 걸음도 어김없이 가고 또 온다. 일기예보는 다음 주부터 더 추워질 것이고 눈도 올 것이라 한다. 겨울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그런데도 앞뜰의 국화는 아직 한창이다. 그윽한 향기가 귀한 한약 내음 같다.
이렇게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피어 있는 국화를 보면 시끄러운 세상일이 저절로 잊혀진다. 꽃이 주는 기쁨이 참 크다. 오늘 성당으로 가는 길목의 유치원 길가에서 붉은 꽃이 몇 송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흡사 부모 없는 아이가 추위에 떨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입술이 시퍼렇게 언 아이처럼 하고 낯설게 피어 있는 꽃을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쭉꽃이다. 세상에나! 봄에 피는 철쭉이 12월 달에 피어나다니. 나는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고 확인해본다.
옆에 잇달아 무리를 이룬 다른 철쭉들은 겨울잠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이 철쭉꽃은 어이타가 이토록 뒤늦게 피어난 것일까. 이 꽃나무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봄에 피지 못하고 ‘식물인간’처럼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이제야 정신이 깨어나 피게 된 것인지,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계절을 잊고 한 해에 두 번 피어난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작년에도 이렇게 늦게 피어난 철쭉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도 눈 온 날이었던 것 같다. 봄에 피는 철쭉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다가 이 추운 날씨에 뒤늦게 홀로 꽃을 피워낸 것은 아닌지 제멋대로 나는 온갖 이유를 들이대고 상상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제 철을 까마득히 잊고 추운 날 피어난 철쭉꽃이 참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 떽쥐배리의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 떠올랐던 것이다.
"저녁에는 나에게 유리 덮개를 씌워주세요.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은 매우 춥군요. 설비가 좋지 않고요. 내가 살던 곳은..."

‘어린 왕자’의 별에 씨앗으로 날아온 장미가 막 피어나서 어린왕자에게 한 말이다. 이 철쭉도 내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까닭이야 어찌된 것이든 활짝 핀 철쭉꽃을 위해 정말 유리덮개 같은 것이라도 씌워주어 추위를 막아주고 싶었다.
이렇게 제 철을 잊고 때늦게 피어난 철쭉꽃을 보면서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새삼 생각해보았다. 사람도 때를 놓치고 뒤늦게 뜻을 이룬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정말이지 사람에게도 무슨 일이든 늦는 법이란 없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시계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한 채 피어난 철쭉의 개화에 측은함과 함께 찬탄을 보냈다. 무슨 연유로 겨울 어귀에 봄꽃이 피었는지 모르지만 이 철쭉에게 마땅히 찬탄을 보내야 한다고 진지하게 결의했다. 너 잘 피었다, 장하다.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이 철쭉이야말로 자기 생애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서 한번은 피어야 할 소망을 기어이 이룬 거라고 본다.
날은 더욱 추워져가는 데 결국 철쭉은 며칠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고 말리라. 그런 운명인들 어떠랴.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오른 등반자가 올라갔다가 곧 하산하지 않던가. 소망은 피어나는 것이다. 나이가 칠십이건 팔십이건 누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법이다.
설사 내일 세상을 하직한다고 해도 오늘 할 일이 있다. 가슴 속에 간절한 소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 꽃은 언젠가는 핀다. 아니, 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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