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동포 이야기① 디아스포라의 이주사
고려인 동포 이야기① 디아스포라의 이주사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4.07.0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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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땅에 흩어져 사는 우리의 또다른 이산가족 디아스포라(Diaspora). <시민의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재완 시민기자는 고려인돕기운동본부와 한인 러시아 이주 150주년 맞이해 모국초청행사를 위해 지난 6월 14일 러시아로 동행해 22일 함께 들어왔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 시민기자는 이미 지난 2011년부터 연해주를 다니며, 고려인 동포들의 영정 사진,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을 해왔던 터라 고려인들과 알고 지내온 인연이 꽤나 있었다.

앞으로 고려인 이주사 뿐만 아니라 강제 이주에 얽힌 이야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의 이야기 등 함께 지내온 고려인 동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총 4회에 거쳐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한다./편집자주

   
 
디아스포라(Diaspora) 의미는 이산(離散)의 뜻이며, 그리스어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서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1948년에 이스라엘 공화국이 건국이후, 이스라엘 밖에 사는 유대인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우리에 디아스포라는 누구일까? 조선족, 고려인, 제 1세대의 미주지역 교민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난 5월 말쯤 ‘고려인 돕기’ 단체에 근무하는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인 러시아 이주 150년’인데 러시아에 갈 의향이 없냐고, 지난 6월 초순에 러시아행을 결심하고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1860년 나라만 믿고 있는 선량한 민초들은 대원군의 섭정시대로 혼미한 조선을 버리고 한인 13 가구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으로 이주 하면서 프리모리아의 가슴에 피 같은 이주 역사는 막을 연다.

초창기 유민들 대부분은 함경도의 농민과 어민들이었다. 함경도는 조선정부의 차별 정책으로 인해 항상 푸대접을 받아온 지역으로, 이곳 농·어민들에 대한 학정은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였다.

그나마 중앙 정부로부터 차별받는 함경도였지만 그곳에도 어김없이 타락한 벼슬아치와 양반들에게 수탈을 당했다. 양반들만이 토지 소유권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토지의 대부분은 양반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을 거의 '노비' 상태의 소작인들이었다.

농민들은 제도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고, 지배 계급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다. 인격도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들에겐 오직 의무와 복종만 있었다. 그 소작인들에 대한 지배계층의 착취는 다른 지방보다 훨씬 심했다.

지배계층들은 그들의 정치적 불우함을 농민들에게 분풀이하듯 했다. 함경도는 산악지대로 경지면적 자체가 협소한 데다, 거듭되는 수탈과 영농의 기술부족으로 늘 궁핍을 면치 못했다. 또한 가뭄과 폭풍우 등 자연 재해에 대한 아무런 방비책도 피해 복구 책도 없었다.

농어민들은 지배계층에 대한 상대적 빈곤감의 증폭과 좌절감으로 흔들렸다. 특히 변경지대 농민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없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정치는 불안과 혼란이었다.

붕당과 척족들의 세도정치와 부패, 계속되는 민란과 병란으로 변경지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래서 농어민들은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안됐었고,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황폐해진 산천을 떠나 안주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타국을 동경하고, 국경을 넘을 충동이 일어났다. 사실 오래 전부터 국경을 넘어 북만주나, 연해주의 바닷가 쪽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의 이주사를 살펴보면,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 한인 13가구 최초 기록되며, 1863년 한인 연해주 이주 시작으로, 1867년 185가구 999명, 1869년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1만 명의 이주가 급증했다.

1902년 한인 이민자 수 32,380명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 기지화로 인하여, 1908년 의병 건수 1,451건 참가 인원 6만9천8백여 명 참여 하였으나, 일본의 공작으로 연해주 총독의 방해로 의병 활동 만주 이동하게 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한인 이민 급증하였으며, 1914년 교민 수 6만3천 명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건설이 되며, 1918년 4월 일본군은 ‘국제 간섭군’이라는 미명으로 연해주를 점령 한다. 1920년 4월 4일 야간을 틈탄 일본군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지에서 극동공화국 부대를 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4월 5~6일에는 신한촌을 급습 방화와 학살의 만행을 자행한다.

1922년 10월 일본군 연해주 철수, 친일 거류민단 5천 명과 함께 귀국했다.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지 25만 명 이상 거주 한다. 1932년 연해주에는 한인 학교 380개, 잡지 등 6종, 신문 7종 등 연해주 시대의 최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1937년 여름부터 2,500여명의 지식인과 한인지도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처형을 당했다. 같은해 9월 21일 ~11월 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이 중앙아시아(6천㎞) 강제 이주당하는 아픔을 겪게 됐다.

이후 스탈린 사망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원동(遠東)이라 부르던 연해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사막에서도 먼 동쪽 원동(遠東)을 향하는 묘지를 쓰면서 그리던 곳으로 돌아온 우리에 이산가족 디아스포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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