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동포 이야기② 디아스포라의 강제이주
고려인 동포 이야기② 디아스포라의 강제이주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4.07.10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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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땅에 흩어져 사는 우리의 또다른 이산가족 디아스포라(Diaspora). <시민의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재완 시민기자는 고려인돕기운동본부와 한인 러시아 이주 150주년 맞이해 모국초청행사를 위해 지난 6월 14일 러시아로 동행해 22일 함께 들어왔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 시민기자는 이미 지난 2011년부터 연해주를 다니며, 고려인 동포들의 영정 사진,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을 해왔던 터라 고려인들과 알고 지내온 인연이 꽤나 있었다. 앞으로 고려인 이주사 뿐만 아니라 강제 이주에 얽힌 이야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의 이야기 등 함께 지내온 고려인 동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총 4회에 거쳐 생생하게 전달한다./편집자주

문서 지령N148-326號 CC소련인민위원회 중앙회의
전 공산당 연매
1937년 8월21일

내용: 극동지방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고려인의 이주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이 결정을 한다.
즉 ‘블라디보스톡, 몰로또위스크, 크로르되고위스크, 한까이스크, 호를리스크, 칠리고위스크, 쓰바스크, 스마고위스크, 뽀스트스위스크, 기로위스크, 갈리닌스크, 라조, 쉬보드논스크, 블라고, 위신스크, 띰보위스고그, 미할리르위스고그, 불류회로스크 등 19개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남부 카자흐스탄 알라스키바다 발르하스 지방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다.’라는 문서가 발송되면서 스탈린의 소수민족 억압정책의 첫 희생자로 지목된 한인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가구 95,256명 등 총 36,442가구 171,781명이 아무런 대책 없이 나라 없는 불쌍한 백성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고려인 동포가 6,000km나 떨어진 중앙아시아에 가야 했을까?

당시 8월21일자 문서에 따라 지식인들의 사전 처형이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졌고 구금과 체포, 학살, 유배 등으로 시작되면서 2,500여명의 한인지도자들도 사전 숙청된다. 그리고 9월 7일 내무서원은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네가지 지침만 알리고는 황급히 사라진다.

1) 모든 재산은 그대로 두고 떠난다, 2) 논과 밭에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여도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3) 이주자는 친척방문이든 학교방문이든 그 현지에서 떠난다. 4) 먹을 식량은 3일분을 휴대하여 가지고 떠난다.

농사가 천하지본으로 알고 살아온 고려인들은 수확을 며칠 앞두고 이주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전달사항을 수군거리며, 1937년 9월 9일 인근 보연스키역에서 503호 호송열차 와곤에 366가구가 탑승한다.

와곤열차는(Wagon의 러시아식 발음) 화물열차로 창문 하나 없으며, 문이라고는 화물이나 짐승을 실어 나를 때 사용하는 철문이 고작이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그리고 죄도 없이 긴 디아스포라(Diaspora)시대에 정점을 만들기 시작한다.

   
 ▲왼쪽에 보인 검은 열차가 당시 이주 때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화물열차이다.
이렇게 시작된 강제이주는 12월 15일 124회째로 노보시비르스크에 호송열차는 도착하면서 막을 내린다. 지금은 낭만의 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가도 6일 13시간이나 걸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09.8km로 대충 짐작해도 무려 23배나 긴 길이다.

그러나 울란우데를 경유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다시 중앙 아시아행 철도로 갈아타야 해서, 그렇게 해서 약 40일 걸렸다, 그들은 12월의 시베리아 삭풍을 뼛속까지 녹이며 가야했다, 더더욱 큰 골칫거리는 와곤의 화물칸은 화장실이 없어 생리현상의 처리였다.

열차가 석탄과 물을 보충받기 위해 간간히 서면, 모두가 짐승처럼 열차 아래로 내려가 대소변을 본다, 그래서 그것도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세워 용변을 보게 했으며, 마른 음식 제공으로 열차가 서면 추위라도 이길 요량으로 나뭇가지라도 주워 다가 불을 지폈다.

국물이라도 끊이려면 열차가 떠나곤 하여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지도 못한 채 여행을 하다 보니, 어린이 60%가 사망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차 내 발생된 전염병은 홍역과 학질, 말라리아, 이질 그리고 노인네들은 영양실조 등으로 숫한 고려인은 주검 앞에 자조 섞인 말로 “굶어죽지, 앓아죽지, 추워죽지”란 말이 있었다.

당시의 실정을 1938년 인구표본조사를 보면 1천 명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사망률은 20%나 되었다. 이렇게 사막이나, 갈대밭에 내동댕이쳐진 고려인들은 혹독한 겨울을 나야했다. 그들은 그곳에 움막이나 토굴을 지으면서 살아가다가 가족이 유명을 달리하면 바로 그 옆에다 먼 동쪽 연해주가 보이는 곳으로 묘를 썼으며,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연해주를 지금도 원동(遠東) 이라고 부르고 있다.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철저하게 봉쇄된 채로 1953년 스탈린 사망 때 까지 살아야 했다. 일정구역에서 거주제한이 명시된 증명을 소지하고 민족교육이 금지 되었으며, 국가기관에 취업과 취학도 제한을 받아 사회, 정치적 진출을 사실상 봉쇄 된 채로 오로지 집단농장에서 살아 왔었다.

왜! 고려인은 중앙아시아로 갔을까, 소련의 근대화로 식량문제 해결이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황무지가 보였으며, 연해주를 식량의 보고로 만든 고려인이 가장 적합한 소수민족으로 보고 아마도 짜 맞추어진 것 같앗다. 너무 부지런한 우리 조상들의 삶이 디아스포라의 시초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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