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읽고 간 시
바람이 읽고 간 시
  • 문틈/시인
  • 승인 2014.03.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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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기 시에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햇빛처럼 꽃보라처럼/또는 기도처럼 왔는가.’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어릴 적 몸이 아파 절망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이 같은 릴케의 시편과 서정주의 시들이었다.

나는 그 시들을 암송하면서 병상에 누워 젊은 날의 한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사의 독한 처방약과 함께 내 영혼을 울려주는 그 시편들 또한 약만큼이나 효과가 있었지 않았나싶다. 물론 성서도 늘 내 곁에 있었다.

시집이나 성서를 읽다가 잠깐 밖에 산보를 하고 돌아와 보면 내가 읽다가 펴둔 채 나간 시집과 성서들이 딴 페이지로 넘어가 있곤 했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내가 읽은 대목들을 슬쩍 읽고는 나간 것이었다. 그 시절부터 나는 내 이름을 ‘문틈’이라고 지었다.

문틈으로 살며시 들어와 책장을 넘기며 읽고 나간 바람, 그리고 내가 누워서 문틈으로 내다보는 바깥세상. 이 문틈은 내게는 그지없이 슬프고 아름다웠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조그만 통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처럼, 그리로 세상을 볼 때처럼 그렇게 나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문틈으로밖에 보지 못한 세상의 아주 조그만 단면 뿐, 문틈으로 들어와 동무해주는 가느라단 바람 한 줄기 뿐이 아니었던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가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은 내가 읽은 시집과 성서의 구절을 읽고 나서 나와 말없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드맑은 생각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서 한 번도 고향이 어디인지, 나이가 몇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또, 또 그런 것들은 일체 묻지 않는다. 도무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어젯밤 가을비에 낙엽이 길가에 떨어져 맷방석처럼 깔려 있는데 그 우를 걸어오면서 무슨 느낌이 들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따름이다.

만일 그 사람이 그 황금빛 낙엽들이 흡사 피아노 건반에서 떨어져 나온 악보 같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의 두 손을 잡고 내 영혼의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와 어쩔 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느냐다.
내가 따뜻한 방에서 녹차를 마시는 동안 찬바람 속에서 풀빵을 팔고 있을 가난한 포장마차 부부를 떠올리며 마음 한 쪽이 싸해지는 것을 느끼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 가난에 굶주리며, 병고에 시달리며, 억압에 신음하며, 난민으로 망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틈으로 들어가는 바람처럼 가서 시 한편을 읽어 주고 싶은지, 나는 진정 그의 생각을 알고 싶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시대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느냐인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넓혀주는 방법으로 때로 시를 읽었으면 한다. 읽는 것이 아니라 외워 암송했으면 한다. 내 어릴 적에 동네 어른들은 술 한 잔 거나하게 마시면 ‘청산리 벽계수야……’하고 시조를 길게 내뽑으시곤 했다. 그런 모습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러나 요즘은 생활이 너무 팍팍해서 그런지 그런 시정을 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 고장에는 예컨대 김영랑, 이동주, 김현승, 박성룡 같은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편들이 많다. 시 한편을 암송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틈으로 들어와 시집을 읽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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