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남자
봄을 기다리는 남자
  • 문틈/시인
  • 승인 2014.02.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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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선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 봄을 몇 십번씩이나 보게 된 것은 엄청난 축복이라는 뜻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은 이래로 나도 해마다 새 봄을 맞이한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와 은총을 느낀다. 이제 겨울이 끝나가는 시기가 다가오고 머지않아 봄은 기어이 이리로 올 것이다. 
푸른 봄, 생각만 해도 약속한 선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이다. 정말 얼어붙은 계곡의 물들은 다시 입이 풀려 노래를 부르고, 빈 나뭇가지에는 아얏, 아얏, 표피를 찢고 터져 나오느라 여린 싹들이 돋아나오고, 우리 마을 803동 앞뜰 산수유나무에도 그 거품 같은 노오란 꽃들이 조용히 피어날까. 정말? 흡사 봄이 온다는 것이 내게는 생전 처음 보는 기적이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는 봄의 내방이 헛소문처럼 잘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봄은 올 것이다. 그 젊은 영국 시인 셸리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는데 그 같은 시는 불세출의 천재나 겨우 쓸 수 있을 터이다. 무슨 징조 같이, 무슨 축제 같이, 봄은 와, 와, 소리없는 함성을 지르며 밤으로 낮으로 지금쯤 어디메 한 걸음씩 봄은 오고 있을 것이다. 사실 봄이 온다고 해서 나로서는 딱히 기다려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푸른 봄을 맞이하러 들판에 나가 보고 싶은 것, 밭고랑 사이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만져보고, 대지에 연초록 풀잎들이 삐죽삐죽 솟아나는 그 놀라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머리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축복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따름이다. 
나로서는 그것으로 족할 뿐 더 바랄 것이 없다. 만일 한 가지만 딱 할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안 닿는 들판 같은 데 나아가서 키대로 엎드려 봄의 대지를 껴안고 싶긴 하다. 그러다가 혹여 사람 눈에 띠기라도 해서 “봄이 오면 꼭 미친 놈이 한두 놈 생긴다니까.” 하는 악담을 듣게 될까봐 두렵긴 하지만. 
하지만 엎드려 푸른 색을 칠한 대지를 두 팔로 껴안고 궁그는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온몸이 피가 콸 콸, 소리를 내며 도는 듯하다. 봄은 젊은 날의 내 신부처럼 오고 있을 것이다. 봄을 기다린다는 말처럼 신선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시방 나는 누구보다도 봄을 기다리고 있다. 글을 막 깨친 아이가 동화를 읽듯이 봄을 나는 그렇게 읽을 것이다. 
나 말고도 봄을 기다리는 친구들은 많다. 종달새는 말할 것도 없고, 백합, 진달래, 수선화, 아니 세상의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목을 빼어 봄을 기다릴 터이다. 하지만 아직은 엄동의 계절. 한참 더 기다려야만 한다. 이 추위를 견디고, 담금질을 당하고, 추위에 포박당한 채 한참 겨울에게 시달린 후에야 봄은 비로소 푸르른 모습으로 이 땅에 도래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혹독한 겨울이 없다면 푸른 봄도 없을 것이다. 종달새는 새봄에 부를 그의 노래가사를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진달래, 백합, 산수유...이런 봄꽃들도 색색깔의 제 화장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만물은 지난 해 봄에 차려입었던 그 차림을 산뜻하게 입고 여기 저기서 나타날 것이다. 아, 봄을 기다리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축복을 받은 듯하다. 
생명 있는 것들에게 ㅋ, ㅋ, 문자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기어이 살아남아 저기 오는 봄을 한번 더 보아야 한다고. 어릴 적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땅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가느다랗게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오는 봄을 살 수 있다면 삼천리 강토가 다 내 땅이 될 터이다. 그러니 우리는 땅을 살 것이 아니라 봄을 사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봄은 시작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봄 그것만으로 완성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일까. 봄까지 살아남는 모든 것들에게 축복이 있으라. 당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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