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문화권력을 경계한다
<편집국에서>문화권력을 경계한다
  • 정인서 편집국장
  • 승인 2013.12.2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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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서 편집국장

문화는 어디에서 출발할까? 동양사상에서는 문화를 글(文)이라 하고 서양에서는 culture가 밭을 가는 경작이라는 뜻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 출발선이 다르다. 이 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필자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사람이 글을 만들고 글을 쓰며 사람이 밭을 갈고 사람이 수확을 얻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는 사람의 행동이나 지각의 반증이다. 인간의 자연주의적 태도에 대한 인격주의적인 정신영역으로서의 언어나 텍스트가 문화를 생성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문화의 주체자이며 각종 도구와의 인터페이스(interface)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간다고 하겠다.
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소통이다. 그 문화가 어떤 형태이건 어떤 작용을 하건 간에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도구 사이의 소통 역할을 통해 본질과 은유 사이의 경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이 때 사람은 메타포(metaphor)적인 현실 은유와 파타포(pataphor)적인 가상의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21세기는 파타포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까지 메타포를 배웠다면 이제는 파타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을 이용한 가상 체험을 실제 상황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닌텐도 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떻든 현실에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처럼 가상에서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것은 가상현실을 이용한 것이든, 증강현실을 이용한 것이든, 체험하려면 신체를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Legible City·1988)는 암스테르담 시내를 인터페이스로서의 자전거를 타고 가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자신의 신체성을 의식하고 경험하게 만든다.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disembodiment)을 넘어 ‘다시 신체로 들어오는 체험’(reembodiment)을 하는 것이다.
이제 문화는 텍스트적인 영역을 떠났다. 과거 우리가 책을 읽고 그림을 보며 ‘문화적’인 삶을 누려왔다면 이제는 디지털을 통한 체험을 통해 문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고정관념으로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시대와 사회적인 양태를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만큼 문화는 과거처럼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인 변화를 겪는 게 아니라 이제는 디지털혁명처럼 짧은 시기 동안 부지불식간에 문화를 겪는 상황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리드할 문화적 지도자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는 기다리고 앉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문화를 찾아내고 엮어서 항상의 가치로 노출시켜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대에 문화중심도시 광주가 추구하는 문화적인 브랜드 가치가 무엇일까에 고민해본다. 대한민국에서 ‘문화’를 이야기할 때 그 거점이 되는 도시로서 광주를 내세우려면 어떠한 일들이 필요한지 지역의 문화리더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장이 먼저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광주가 언제부터인가 ‘문화권력’으로 지칭되는 몇몇 사람들이 지역문화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들은 지역문화와의 소통보다는 자신이 문화적 황제인양 치부하고 모든 결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보전에 집착하고 있다. 어떻게든 자리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점을 지역의 일부 문화계 인사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이 문화도시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일이라면 상관치 않을 수 있다.
문화의 출발은 사람이지만 자칫 사람이 그 문화를 망가뜨릴 수 있다. 광주가 그런 형국이 될까 무척 염려스럽다. 문화도시 광주의 문화적 브랜드는 사람이 만들어간다. 그런데 문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래서 광주 문화는 정체되고 있다. 좀 욕심을 갖고 문화를 키워볼 요량은 영영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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