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에 발걸음을 멈추다
보름달에 발걸음을 멈추다
  • 문틈 시인
  • 승인 2013.12.18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서운 찬 바람이 귀싸대기를 때리는 듯하다. 뺨이 시렵다.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른다. 거리의 나무들도 발목이 시린지 웅크린 모습이다. 시베리아. 나도 모르게 입술에서 이름 부르듯 새어나온다.
북국 먼 시베리아에서 온 겨울 소식이 귀바퀴에도 되게 춥다. 그래도 아직 몇 십분을 더 걸어야 집이 나올 참이다. 찬바람을 몸으로 밀어내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겨울의 맛도 딴은 싫지는 않다.
인생살이에 추울 때도 있고 따뜻할 때도 있는 법. 계절이야 무슨 탓할 것이 있겠는가. 겨울이 먼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또 봄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몸이 떨리는 듯한 찬 기운을 품어안으며 되도록 친밀감을 표하려 한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혹시 눈발이나 흩날릴까봐서다. 그러나 하늘은 깊고 푸른 색깔로 얼어 있는 모습이다. 구름 한 점 없다. 803동 아파트 꼭대기에 둥근 달이 걸려 있다. 그야말로 낙목한천에 보름달이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보름달의 ‘쇼’에 눈길을 보낸다. 어느 싯귀처럼 아이가 갖고 놀다가 버린 풍선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달은 태를 지어 말하려, 말하려는 듯하다. 한참을 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에서도 찬 물 같은 기운이 인다. 밤 날씨가 너무나 찬 탓이려니 한다.
그런데, 아무도 저녁 귀가길의 머리 위로 보름달이 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없다. 마치도 애써 무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닐 것이다. 사느라 바빠서 추워서 보름달은 보지 못한 탓이겠지 한다. 달은 무척이나 커 보인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추운 밤의 보름달.

나는 그 달을 혼자 차지한 사람처럼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몰래 어디에 감추어둔 것도 아닌데 저 보름달을 나 혼자 가진 듯한 느낌이 들다니. 달은 깊고 푸른 하늘로 오르고 솟아올라 제 갈 길을 천천히 움직인다.
나에게 오늘의 톱뉴스는 단연코 보름달이다. 밤에 보름달을 본 지가 대체 얼마만이냐. 도시의 휘황한 불빛 때문에 별도 달도 보지 못하고, 아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 서둘러 집을 나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느라 달 따위는 볼 짬도 없으렷다. 나는 한참이나 나무에 기대어 보름달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늘 저 먼 데서 달이 내게 보내주는 영상을 보고 있으려니 달빛이 내 눈에 안약처럼 조금씩 스며들어 자꾸만 눈을 부드럽게 한다. 이 나이에 눈물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나는 달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귀가를 서두른다.
옛적에 이백, 왕유, 두보, 도연명 같은 걸출한 시인들이 달빛을 술잔에 띄우고 술을 마셨다는데 나는 모태 금주라 멋대가리 없이 그저 달에게 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술 못하는 내가 무슨 죄업이라도 타고 난 듯하다.
술 석 잔이면 현인이 되고, 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쳐진다고 노래한 옛시인의 경지가 한없이 부럽기도 하다. 그림자를 이끌고 집에 당도하니 한기가 더욱 세차서 앗 추워, 하고 몸을 한번 떨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집 사람이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묻는데도 나는 보름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까 달이 내게 말하려는 것이 실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아서. 이 추운 밤에 보름달을 본 자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행복하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